첫 번째 장: 자기 소개
첫인상과는 다르게 – 그녀는 큰 키와 밝고 세련된 외모를 가지고 있어 눈길이 간다 – 한식을 엄청 좋아해요. 주변에서도 저에게 파스타나 와인을 좋아할 것 같다고 얘기하지만, 제 취향은 김치찌개나 김밥에 더 가까워요.
제 큰 키는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때부터였어요. 그전까는 늘 위축되어 있었어요. 만약 학교 다닐 때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아이였는지를 물어본다면 존재감이 없는 아이라고 말했을거예요. 그 이유에는 가정환경이라던지 여러 가지가 있었죠. 지금에서는 내가 극복할 수 있는 문제이지만, 어렸을 때는 그러할 힘이 별로 없잖아요. 늘 스스로 위축되어 있던 거죠.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먼저 위축되어 있었고, 그랬기에 늘 소극적이었어요.
지금도 제 기질은 남아있어요. 이번 자서전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에 호기심이 확 생겨도 "제가 할게요"라는 말을 쉽게 못 꺼내고 있는거예요. 계속 망설이다가 프로그램이 끝날 때 즈음이 되어서야 말할 수 있었죠. 오늘날에서야 이 정도도 용기가 생긴거죠. 어렸을 때는 그 기회를 계속 놓쳐왔어요. 소극적이여서 마음속 말을 밖으로 꺼내기 어려웠던거죠. 심지어 성인이 되었어도 식당에서 맛있는 반찬을 몇 번이고 더 시켜 먹고 싶어도, "반찬 좀 더 주세요"라고 여쭙는 것조차 쉽지 않았어요. 그랬던 제가 어떤 계기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어느정도 개선이 되었어요. 제 성향 자체가 자율적으로 뭔가를 시도하기보다는 누가 시키면 열심히 하는 스타일에 가까웠어요. 그래서 오히려 학교 다닐 때 조회나 종례처럼 정해진 틀이 주는 안정감을 좋아했어요. 대학에 들어가서는 자유롭게 수강하고 집에 오는 그 자유로움이 오히려 적응이 안 되더라고요.
또 하나의 모순적인게 있다면, 저는 보기보다 사람을 잘 사귀지 못해요. 막내라서 그랬는지, 어릴 땐 정말 많이 울었어요. 고등학생까지는 매해 새로운 학년으로 진급하면 친구들이 바뀌는데 그게 너무 싫은 거예요. 학년이 바뀌면 그렇게 맨날 울었어요. 신학기 초가 되면 짝꿍이 바뀐다고 울어댔죠. 짝꿍이 바뀌는 것도 싫고, 새 친구에게 말을 거는 게 너무 어려웠어요. 그때는 오히려 빨리 대학교에 가고 싶었어요. 대학교는 4년 동안 친구가 안 바뀔 테니까 좀 낫지 않겠냐는 생각이었어요.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던 환경이 저에게는 굉장히 큰 영향을 주었어요. 저는 1남 4녀 중 막내였는데, 늘 제 안에 그 환경이 일종의 '상처'처럼 남아 있었어요. 제 언니들이 “너는 그게(가정환경) 그렇게 상처였어?” 라고 물어볼 정도였으니까요. 막내라면 아무 걱정 없을 것 같잖아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릴 때부터 ‘낭비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렇다고 집안의 경제적인 얘기를 자주 꺼냈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녜요. 그래서 언니가 저한테 이상하다고 했죠. 아무도 나에게 경제적인 것과 관련해 한 번이라도 압력을 주거나 돈을 아끼라고도 하지 않았음에도 누군가가 “뭐 사줄까?” 하면 “괜찮다”고, “안 먹고 싶다”고 답했었어요. 언니들은 돈이 생기면 바로 쓰는 스타일이었는데, 저는 세뱃돈을 받았다 하면 2년이고 3년이고 안 쓰고 가지고 있었어요. 결국에는 언니들의 꼬임에 넘어가서 다 써버리게 되었지만요. 그때부터 길러지던 생각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어요. 저는 언니들이랑은 달랐어요. 성향은 비슷한데 생각은 좀 달랐던 거 같아요. 5남매이다 보니 큰언니하고는 꽤 나이 차이가 나지만 넷째 언니와는 조금밖에 차이가 안 나요. 큰언니부터 작은언니까지 사이가 너무 좋았어요. 원래 자식들은 부모님 사랑을 더 받고 싶은 마음에 서로 질투하잖아요. 물론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바로 위 언니가 날 너무 미워했고, 무섭기도 했어서 사이가 좋지 않은 적도 있어요. 하지만 시간이 흘러 제일 친해졌죠.
계기가 있다면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셨고, 그때부터 어머니께서 슈퍼우먼처럼 사시는 모습을 제가 늘 보아왔다는 거예요. 늘 바쁘셨지만 저희에게는 단 한 번도 부담을 준 적이 없다는 것이 어머니의 대단한 점이에요. 보통은 어머니가 바쁘고 하면 큰아이가 집에서 밥을 한다든가 아니면 동생들을 전담한다던가 등 부모의 역할을 하게 되잖아요. 근데 우리집은 그렇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자식들만큼은 손에 물을 묻히지 않게 키우겠다는 마음으로 집안일을 저희에게 일체 맡기지 않으셨어요. 우리 어머니는 대장부 같은 사람이었어요. 저희 집이 광주 시내에 있었는데, 시내에 산다는 것은 도시에 사는 것이니 시골에서 오신 친척분들은 우리집을 자주 왔었죠. 마치 제가 서울에 올라가면 기거할 곳이 없어서 친척집에 가는 것과 같아요. 당연하게 광주 시내로 올라오시면 코스처럼 우리 집으로 와 계셨고 우리 어머니가 다 건사하였죠. 그러다보니 대가족과 같은 느낌으로 살았었어요. 우리 집에 누군가가 꼭 와 있거나 아니면 친척들이 와서 누군가와 일을 같이 하고 있거나 그랬죠. 사촌 오빠들은 다 우리 집을 다 거쳐갔을 거예요.
제 아버지가 공부를 좀 하셨던 것 같아요. 그렇기에 광주 시내로 왔다고 생각해요.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셨음에도 어머니는 아버지 쪽 친척분들과의 연락을 단절하지 않고 계속 이어왔어요. 돌이켜보면 어머니는 대단하신 분이었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는 그런 어머니가 가끔 불이익을 받는 것처럼 느낄때도 있었어요. 지금도 어머니께서는 길에서 깡패들이 약자를 괴롭히는 걸 보면 직접 가서 말리기도 하세요. 너무 무섭지 않나요? 우리 어머니는 그런 걸 해왔던 사람이에요. 근데 저도 닮아가는 건지 불의를 보면 못 참았겠어요. 많이 당하고 나서야 저를 보호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참아보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그래도 우리 가족은 다른 가족들과 비교해도 사랑이 참 많았어요. 막내여서도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지금도 그게 제 안에 남아 있어요. 어머니가 늘 가족을 따뜻하게 챙기셨고, 언니들도 저를 많이 감싸줬어요.
두 번째 장: 5.18 광주민주화운동
태어나고 자란 곳은 전라도 광주 시내예요. 그래서 초등학교 때 5.18 민주화운동을 현장에서 겪었어요. 그 현장이 눈에 보이고 들렸기 때문에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죠. 우리가 6.25 전쟁을 책으로 습득했잖아요. 저는 그 당시 상황이 전쟁이라 생각했었어요. 제가 방송국이 불타는 걸 눈으로 직접 봤거든요. 지금의 광주는 매우 발전했고 넓어졌지만 당시에는 도시에 높은 건물은 별로 없었고 도시 자체가 작았어요. 대부분의 건물들이 낮다 보니 방송국 같은 곳이 상대적으로 높아 보이는 거죠. 시내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다 방송국이 불타는 것을 보았을 거예요. 방송국이 불이 타면서 통신이 완전히 끊어지다보니 방송도 못 보고, 일단 소식이 완전히 끊겼던 거죠. 그때는 텔레비전으로만 접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 당시 소위 ‘복덕방 할아버지’라고 불리는 분들이 소식을 전해주던 기억이 나요. 그분들은 여러 동네를 자주 왔다 갔다 했는데, 몇 가구가 모여 있는 집에 방문해 소식을 전해주셨어요. 우리 집에도 놀러왔었죠. 하지만 그때에는 잘못된 정보들이 많이 들어오던 시기였어요.
학교를 안 가게 되었으니까 처음엔 그게 재미있다고 생각했어요. 학교 운동장이 집에서 가까워서 친구들이랑 놀기도 하고 그랬죠. 그런데 어느 날은 갑자기 대피를 해야 한다는 거예요. 학교에 대피소가 있었는데, 지하실 같은 곳이었어요. 그곳으로 내려가서 숨어 있기도 했던 것 같아요. 당시 큰언니가 대학생이었는데, 언니가 저한테 “너는 걸어서 시골로 피신해”라고 말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리고 밖에 나가 보니 차가 행렬을 이루며 지나가는데, 그 안에는 투쟁하는 학생들이 가득 타 있었어요.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고 사람들에게 먹을 걸 달라고 외쳤죠. 그런 광경을 보니 전쟁이 일어났다고 느낄 수밖에요. 너무 놀라운 일이었을 정도로 아직도 당시의 장면들이 생생하게 떠올라요.
어느 날은 밤에 갑자기 ‘불을 끄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으라’는 말을 하는 거예요. 실제 폭격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또 어느 날은 ‘북한에서 사람이 내려왔다’라는 소문도 돌았어요. 잘못된 소문이 돌았던 거죠. 사람들은 불안에 떨어야 했고, 아이였던 저는 그저 어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믿고 있었어요. 도시가 불타고, 온통 황폐해졌고, 나중에는 사람들이 정말 많이 죽었어요. 어느 날 어른들이 도청 쪽으로 간다기에 저도 따라간 적이 있었어요. 어린아이다보니 빨리 걸을 수도 없었고 해서 천천히 그 뒤를 따라갔던 것 같아요. 그리고 도청에 도착했는데, 그곳엔 실제로 시신들이 있었어요. 보면 안 되는 건 알았지만 도저히 눈을 돌릴 수가 없더군요. 그 장면이 너무 충격적이었고,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그런 기억들이 지금도 제 안에 남아 있어요. 커 보니까, 그 당시 사람들이 잘못된 정보를 내보내고, 사실을 왜곡했던 부분이 저에게는 큰 분노로 다가오더라고요. 서울에 올라왔을 때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하지만 그 시기의 일을 얘기하면 오해를 많이 받았어요. 제가 분노를 드러내면, 사람들은 제가 ‘지방색을 드러낸다’며 비아냥거리기도 했거든요. 그럴 때마다 정말 속상했어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들이 여럿 나왔잖아요. 하지만 영화들이 사실을 다 보여주진 못해요. 제가 겪었던 현실의 10분의 1도 표현이 안 돼요. 그래서 한때는 ‘이건 알려야 한다, 진짜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도 있었어요. 하지만 막상 얘기를 꺼내고 있으면 사람들은 제가 정치적인 색을 드러낸다고 평가하는 거예요. 나는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도 왜 그렇게 받아들이는지 이해가 안 됐어요. 그게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심지어 남자친구랑도 싸운 적이 있어요. 그 사람도 나를 비난하더라고요. 그땐 정말 너무 속이 상하고, 견디기 힘들었어요.
세 번째 장: 학창 시절
중학교 시절이 제일 재밌었어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발달이 좀 늦은 편이었거든요. 월경도 늦게 시작했어요. 그래서인지 그때는 그냥 마냥 즐거웠어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인해 초등학교 시절에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중학생이 되어서야 즐길 수 있었다 보니 더 즐겁기도 했어요. 1학년, 2학년, 3학년 내내 정말 행복했어요.
그러다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사춘기가 늦게 찾아왔죠. 그때부터는 공부보다 친구가 더 중요해졌어요. 지금 생각하면 약간 비정상적으로 느껴질 만큼 친구에게 푹 빠져있었어요. 당시에는 친구가 너무 좋았던 거죠. 그 친구가 너무 좋다보니 나하고만 친구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 정도였어요. 그래서 그 친구가 다른 애들이랑 놀면 괜히 서운하고 마음이 상했던거죠. 그게 사랑도 아니고, 단순한 우정도 아닌 묘한 감정이었어요. 연애 감정과 비슷했던 것 같아요. 그 친구가 ‘조금 생각해볼게’라는 말 한마디에도 나는 너무 가슴이 아프고 힘들어서 울었던 적도 있었어요. 재밌는 건 그 친구에 대한 감정은 나만 그랬던 게 아닌,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친구에 대한 깊은 감정이 사춘기와 함께 심각하게 찾아온거죠. 제가 다닌 학교들이 일제강점기 때부터 있던 학교라 건물이 오래되었어요. 학교 주변으로는 수풀이 우거져있었고, 수업 시간에는 그것만 쳐다보고 있었어요. 계속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거죠. ‘학교에 있고 싶지 않아’와 같은 생각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나 소심했던 아이가 학교를 다니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해요. 학교보다는 사회로 빨리 나가고 싶었고, 뭔가 다른 걸 해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예술 쪽이었나 싶지만 그렇다고 명확하지는 않았어요.
그 나이 땐 나 자신이 멋있어 보이고 싶잖아요. 글을 써볼까, 작가를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어요. 그때는 왜 학교를 그만 다니고 싶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는데, 그저 학교생활이 재미가 없었어요. 그런 생각에 고등학교 2학년 2학기 때부터는 그냥 학교만 다니는 상태였어요. 그럼에도 ‘착한 딸’이어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죠. 그래서 학교는 가기 싫어도 성실하게 다녀야겠다 하면서 다녔어요. 지금 생각하면 일종의 ‘착한 딸 콤플렉스’였던 것 같아요. 그 시절엔 공부를 잘하는 애보다 오히려 공부 안 하는 애들이 인기가 많았어요. 그들을 ‘날라리’라고 불렀죠. 근데 저는 날라리는 못 되었어요. 싸우는 것도 무서워, 아니면 눈에 띄어서 선생님께 잘하는 것도 못해, 그렇다고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조용히 다니는 아이었던거죠. 존재감도 없이 시간을 보낸거죠. 그래도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진 공부를 좀 했어요. 조금만 하면 성적이 꽤 나오기도 했었죠.
당시에는 학생 수가 많아 학급 수도 많았어요. 고등학교에 들어가니 키가 쑥 커버려서. 어느 날은 농구부 애들이 저한테 들어오라며 번호를 주더라고요. 또 선생님이 키가 크니 뒤로 가라고 할 때도 있었고요. 그게 너무 싫었어요. 저는 제가 키가 크다는 것을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마치 내가 ‘키가 커지는 병’에 걸렸나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우리 가족이 전반적으로 키가 큰 편이긴 한데, 그렇게까지 크진 않아요. 외가 쪽 식구들이 좀 큰 편이었고요
고등학교 때는 또 다이어트 생각이 많았어요. 외모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한창 식욕이 왕성할 때인데, 살은 빼고 싶고, 살이 그렇게 찐 것도 아닌데, 괜히 볼살이라던지 내 스스로가 살이 쪘다고 생각한거죠. 중고등학생들의 특징이기도 하는가 봐요. 살을 그렇게도 빼고 싶었고, 계속 날씬해지고 싶었어요. 고등학교 1학년 때 키가 갑자기 커지다 보니 어느 날 무용 선생님 눈에 들었어요. 무용을 하라고 추천해주어서 배워봤는데 너무 재밌는 거예요. 잘 따라서 추기도 했어요. 선생님도 계속 하라고 하셨는데, 제 머릿속엔 ‘무용은 돈이 많이 들잖아’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가난했던 환경에서 가졌던 열등감일지 콤플렉스인지 모르겠지만 왜 그런 생각을 먼저 했을까, 왜 나는 아이답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생각에 나 자신이 슬펐어요. 집에다 무용을 하겠다고 선뜻 말할 수 없겠는 거예요. 그런 얘기를 하면 엄마가 속상해하실 것 같았거든요. 그 나이에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참 짠해요. 결국 선생님께 무용을 안 하겠다고 했어요, 1학년 때는 공부를 조금 했었어서 공부를 할 거라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께서 “네가 공부를 얼마나 잘한다고 그래? 성적표 가져와 봐” 하시더라고요. 나중에 들으니 반장이 선생님께 제 성적표를 가져다줬대요.
대학도 광주에서 다녔어요. 대부분 서울로 가잖아요. 그런데 어머니가 막내인 저만은 곁에 두고 싶다고 하셨어요. 우리 어머니 소원이 그런데…. 저는 또 ‘착한 딸’이니까 거절을 못 했죠. 착했던 게 아니라, 아마 착해야 한다는 마음이 어릴 때부터 너무 강했던 것 같아요.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던 때가 몇 번 있었어요. 대학에 다닐 때였는지 졸업하고 나서인지 잘 기억은 안 나요. 그런데 TV 광고에서 ‘나는 나야, 내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살 거야’와 같은 내용의 말이 나오더라고요. 문득 ‘내가 조금만 더 늦게 태어났으면, 나도 그런 마음으로 살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었어요.
네 번째 장: 서울, 서울, 서울
그때는 광주에 일자리가 거의 없었어요. 지역의 일자리가 단순히 경제문제가 아닌 정치와도 연결되어 있었던 시기였어요. 정부에서 광주는 개발을 안 시켰어요. 아예 지역 자체를 거의 고립시켰다고 보면 되어요. 공장도 없고, 대기업도 없고... 제일 좋은 일자리라고는 선생님 정도가 전부였어요. 부산이나 대구처럼 산업단지가 들어선 곳들과는 달랐죠. 심지어 고속도로만 봐도 경부고속도로는 발전되어 있는데, 호남고속도로는 겨우 2차선이었어요. 그러다보니 서울에 올라갔다가 광주로 내려가면 그 고속도로를 타야 하는데 시간이 꽤 오래 걸렸었어요.
저는 이상하게도 어릴 때부터 서울에 가는 게 꿈이었어요. 초등학생 때부터 “나는 커서 서울 가서 살거야” 라고 말하곤 했어요. 저에게 서울은 뭔가 막연한 동경이었어요. 친구들 사이에서도 서울이라는 도시의 존재감은 꽤 컸어요. 그때는 세상에 ‘외국’이란 게 있는지도 몰랐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이제 막 서울에 자리를 잡은 사촌 오빠가 우리 집에 놀러 왔어요. 제가 평소에 조용필의 ‘서울~ 서울~ 서울~’ 노래를 하도 많이 불렸는데, 그걸 듣고는 저를 진짜 서울로 데려가 주었어요. 그때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어요. 항상 듣기만 하던 곳이었는데 진짜로 가게 된 거예요. 고속버스를 타고 가다 휴게소에 내렸는데, 그때 사촌오빠가 브라보콘 아이스크림이랑, 어떤 이름의 아이스크림, 그리고 호두과자 이렇게 세 개를 사줬어요. 그게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어요. 아직도 그 맛에 대한 기억이 생생해요. 그래서 지금도 호두과자를 정말 많이 좋아해요.
사촌오빠가 천호동에 살았던 것 같아요. 창문을 통해 워커힐 호텔을 봤거든요. 그때는 그게 워커힐인지 줄도 몰랐고, 그저 남섬인가 싶었어요. 그때 저는 속으로 ‘나도 언젠가 이런 데서 살 거야’라고 다짐했었죠. 서울에서 살고 싶다는 꿈이 생겼어요. 그 이후부터는 “사촌오빠에게 놀러 가겠다, 버스만 태워주면 내가 가겠다”고 말하면서 자주 올라갔어요. 거의 일 년에 한 번씩은 놀러갔죠. 나중에 서울에 정착했을 때 친구가 전화로 그러더라고요. 그때가 2002년 월드컵으로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슬로건이 유행하던 때였는데, 거기에 맞춰 내 친구가 “이서석은 꿈을 이루었다”고 말해준거죠. “네가 그렇게 서울 노래를 부르더니 서울에 가서 산다”면서요. 들어보니 제가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서울 얘기를 했다는 거예요.
저는 한강을 무척 좋아했어요. 여의도에 나가 한강에 앉아 있는 게 너무 좋았어요. 제가 느끼기에도 이상하다고 싶을 정도로요. 제 고향은 지방이잖아요. 친구들이 말하길 자기들이 서울로 올라오면 내가 그렇게 한강을 데려갔대요. 친구들은 왜 또 한강을 또 가냐 싶었지만 제가 너무 처음인 것처럼 데려가니 그냥 아무 말 안 했다고 하더군요. 지금도 한강을 지나가면 기분이 좋아요. 어떤 로맨스가 있을 것 같아요. 특히, 어느 다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성수대교처럼 다리를 빠져나갈 때 나오는 특이한 풍경을 가진 길이 있어요. 그 길로 가면 뭔가 이상한 나라로 갈 것 같은 생각을 엄청 많이 했어요. 이상하게 그 다리를 건널 때마다 마음이 두근거렸어요. 그 다리를 건너면 마음이 굉장히 뭉클해진다고 해야 할까.
사실 서울에 오기까지의 과정이 쉽지는 않았어요. 처음 대학 입시 때는 떨어졌거든요. 제가 받은 성적보다 훨씬 높은 학교에 지원했어요. 내 주제에 맞지 않는 학교였죠. 그래도 어차피 떨어질 거 아무 곳이나 써보자 했었고, 정말로 떨어졌어요. 그때는 목표가 단 하나였어요. 서울로 가야 한다는 것. 내가 광주를 탈출하려면 서울로 대학을 가야 하니 그냥 원서를 써야겠다 싶어 유아교육과를 썼고, 당연히 떨어졌죠. 그렇다고 유아교육과에 가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
그러고 나서는 서울예술전문대학교(이하 ‘서울예전’)를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서울예전에는 문예창작과도 있어요. 제가 글 쓰는 걸 좋아했거든요. 고등학교 때부터 글을 써볼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고, 본인 스스로 글을 잘 쓴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래서 문예창작과에 지원하려고 마음을 먹었죠. 마침 서울로 전학 간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대신 원서도 사서 우편으로 보내줬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완강히 반대하셨어요. 어머니는 “너마저 서울 가면 어떡하냐, 미쳤냐”라고 말씀하셨죠. 거기에 어른들 눈에는 전문대 가는 것도 창피한데, 전문대를 서울로 간다는 게 말이 안되는 거였죠. 당시의 서울예전은 지금과 달리 아무나 갈 수 있는 수준의 경쟁률이 낮은 전문대였고, 인지도도 높지 않았어요. 결국 어머니는 저에게 차라리 후기 대학교를 쓰라고 설득하셨어요. 그때 제가 이틀 밤낮을 울었어요. 진짜 큰마음 먹고 꿈도 꿨었는데, 원서도 받은 시점에서 어머니로 인해 꺾이니까 너무 속상했어요. 결국에는 못 갔어요. 만약 그때 입학했다면 동기 중에 유재석 씨가 있었을지도 몰라요. 그때의 서울예전은 공부 못해도 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서울예술대학교가 되면서 학교 명성도 경쟁률도 너무 높아졌어요. 재능 있는 아이들이 많이 지원하게 되었으니까요. 어떤 전공은 한국예술종합학교와 비교될 수준이라 하더군요.
결국 저는 광주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고, 졸업했어요. 하지만 대학생활은 재미가 없었어요. 내가 배운 공부로 뭘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없었거든요. 그냥 시간만 보낸 느낌이었어요. 졸업하고 나서는 일 년 동안 백수로 지냈어요. 마침 제가 대학 다니던 때 언니가 서울에 올라가면서 결혼도 하면서 살고 있었어요. 그래서 또 사촌오빠 때처럼 핑계를 대며 서울로 올라갔어요. 일 년에 한두 번씩 방학 때마다 갔는데, 어머니께서 언니네 집에 전해줄 김치나 반찬을 직접 만들면 제가 직접 전해주겠다고 했죠. 서울에 올라가면 언니네 집에서 거의 기생충처럼 붙어 지냈죠. 그리고 결국,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미련 없이 서울로 바로 올라와서 백수 생활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진짜 서울에서의 삶이 시작되었죠. 가장 먼저 한 일은 학원을 다니는 거였어요. 특별히 염두해 둔 건 없었고 그냥 학원을 다녔어요. 일단은 뭔가 해야 했었으니까요. 돈을 벌어야 할테니 비서 전문 학원도 다녀보았어요. 그렇다고 또 취업은 안 해. 서울에 사는 거가 좋았던거죠. 사람들을 만나고, 홍대 앞 클럽도 가보고, 서울이라는 도시 자체가 너무 신선했어요. 서울이 고향인 사람도 있고, 지방에서 온 사람도 있고 하니 재밌더라고요. 하지만 계속 그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비만 하고 살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조금씩 다음을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다섯 번째 장: 취업을 하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지 못하고 나니 마음이 한 번 툭 꺾였어요. 이후로는 자포자기 식으로 아무 데나 지원해서 들어갔죠. 그러다보니 학교를 다니는게 너무 재미가 없었어요. 한번은 신문방송학과 수업도 들어보기도 했는데, 관심은 갔지만 그래봤자 지방이라 싶어 마음이 안 붙었어요. 뭐라도 공부하면 좋았을텐데, 공부는 하지도 않으면서 ‘지방에서 대학을 나와봤자 뭐하나, 서울에 가야겠다’라는 생각만 점점 커진거죠. 그러다 이제 졸업하고 백수로 있으니 어머니는 저의 그런 꼴을 도저히 못보시겠다고 했어요. 어머니는 늘 정석대로 살아야 한다는 분이었거든요. ‘내가 돈을 벌 테니, 너희는 공부를 해서 너희 길을 가라’가 어머니의 신념이었어요. 근데 저는 그때도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취업도 하기 싫었고, 새롭고 창작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해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어머니의 꿈은 본인의 자식이 직장인이 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결국 저는 다시 기가 꺾였고, 취업을 했어요. 한국통신이라고, 지금은 KT로 알려진 기업이죠. 이제는 누구나 아는 대기업이지만, 그때는 공공기관이었고, 2000년대에 들어 민간 기업으로 바뀌었어요. 어머니의 꿈이니까 그곳으로 입사했고 3년 전에 그만두었어요. 정말 오래 다녔죠. 보통 회사에 들어가면 경영, 기획, 마케팅 등 전문성을 따졌을텐데 KT는 그렇지 않았어요. 인사 시즌이 오면 희망부서를 지원해서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또는 소위 ‘라인’에 따라 부서를 이동하고는 해죠. 어떤한 전문성이 없이 업무분야를 바꿀 수 있는 거예요.
신입사원으로 들어오면 가장 먼저 현장으로 보내요. 지역마다 지사라고 기지국이 하나씩 있거든요. 지역마다 업무를 처리해주는 지점 같은 게 있는 거죠. 그때는 시골에서부터 시작해 도시로 오는 거였어요. 서울에 있어도 되지만 그래도 현장은 한 번쯤은 다녀 오라는 문화가 있어 대부분은 가게 되었어요. 1~2년 정도 있다 돌아오거나, 또는 시험을 거쳐서 오거나 했었어요. 지금은 그런 문화가 없어졌는데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갔다 와야하는 게 당연했었죠. 입사 후 지방으로 발령받았고, 그곳은 해남이었어요. 울면서 내려갔죠. 그곳으로 가게 된 배경에는 어머니가 전라권으로 오라는 말씀도 있었어요. 광주가 싫어 백수였어도 서울로 올라갔는데, 취업을 하고나니 시골로 가게 되어 너무 싫었어요. 울며불며 이불을 싸들고 해남으로 내려갔죠. 그랬던 제가 막상 또 가보니 적응을 잘했어요.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많은 수의 젊은 직원들이 발령 받아 와있었어요. 그곳은 지역의 지사이다 보니 근무지가 크고 직원 수도 꽤 많았어요. 해남에 내려오기 전에는 ‘잠바때기’만 입고 있는 동네 시골 아저씨만 상상했어요. 나름 제 자신을 서울 물 좀 먹은 아가씨라고 생각했던거죠. 그곳에는 젊은 사람들이 정말 많았고, 그러다보니 정말 재미있었어요. 시골이다 보니 일 끝나면 할 게 없잖아요. 퇴근하면 다 같이 모여 매일 노는 거예요. 삼삼오오 모여서 바닷가 가고, 삼겹살도 구워 먹고, 바람도 쐬고 하면서요. 금방 그곳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지요. 얼마 있었다가 광주 지사로 이동했고, 그 다음엔 다시 서울 본사로 올라갔어요. 본사는 치열한 곳이에요. 본사에 있다가 현장에 갔다가 다시 본사에 갔다를 반복하면서 지냈어요. 그리고 2020년부터 코로나가 왔을 때, 문득 ‘나는 이제 충분히 했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회사를 그만뒀어요. 한 곳에서 굉장히 오랫동안 일을 했어요. 주변 사람들은 ‘그만둔다고 말하던 애들이 제일 오래 다닌다더니 그게 바로 너다’라고 말했는데, 정말이었어요. 저는 종종 “그만둘 거야”, “올해까지만 있을 거야”라는 말을 하고 다녔거든요. 진짜 그만둘 사람은 조용히 정리하고 말없이 나가거든요. 그만 두게 될 즈음에서야 무슨 말이지 알겠더군요. 정말 그만 다녀야겠다라고 생각할때는 마음의 정리가 끝나는 거죠. 마치 이순신 장군이 자신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셨던 것처럼 저 또한 떠날 때 아무 말 없이 그만두는 거죠.
KT에서는 진짜 다양하게 업무를 보았어요. 처음에는 비서부터 시작했어요. 그때는 일반 직원에게도 비서 업무를 주기도 했거든요. 신입사원들은 나이가 어리다 보니 맡는 일이 종종 있었죠. 나중에서야 직원 인건비를 불필요하게 낭비하는 것으로 얘기가 되어서 그런 문화는 사라졌어요. 지금은 따로 인력을 뽑죠. 그리고 민원 업무 또한 신입이 맡게 했어요. 신입사원들은 어리고 경험이 적다 보니 현장 업무들을 다 경험해보라는 거였죠. 어릴 때 회사를 들어가면 다 해낼 수 있다고, ‘일당백’이라고 하잖아요.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 하는 거죠. 시험을 네가 쳐라고 하면 시험을 봐야했고, 또는 아침에 국민체조를 하거나 회사 헌장을 낭독하는 시간도 있었어요. 신입은 어리고 머리가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 시험도 낭독도 시키는 거죠. 광주지사에 있을 때 지역 지사를 총괄하는 전남본부에서 관계자를 보내 아침 헌장 시간을 갑자기 점검하겠다고 하니 저에게 낭독하는 걸 시켰어요. 급하게 준비했는데도 좋게 보셨는지 스카우트가 되어서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어요. 그러고나서는 홍보실로 이동했어요. 홍보실 이후에는 감사실로 갔다가, 다시 현장에 갔다 오기도 하고, 마케팅도 했다가, 컨설팅도 했다가…. 제일 마지막에 맡았던 업무는 컨설팅이었어요. KT에서는 참 여러 일을 했어요. 한 군데에서 전문성을 쌓는 구조가 아니었죠.
중간에 다른 곳으로도 이직하려고 노력도 해봤어요. 헤드헌터를 만나보기도 했는데, 상대방 말로는 제가 다니는 회사는 브랜드 가치는 높지만 커리어로 인정하기는 애매하다고 평가하는 거에요. 지금은 대기업이라는 인식이 대중적이지만, 부서 이동이 잦다고니 업무 전문성도 연차 대비 높지 않고, 때문에 이직을 해도 연봉을 높게 받을 수 없을 거라는 거죠. 당시의 헤드헌터는 요즘처럼 능력 있는 사람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전문가였기 보다는, 이직하는 걸 도와주는 역할이 대부분이었어요. 그러다보니 이직 생각은 했지만, 기회는 없더라고요. 특별히 잘할 수 있는 업무도, 능력은 더 없지, 또 게으르기도 했어요. 생각은 많지만 게을렀기에 무언가를 실행력 있게 하지는 못했어요. 차일피일 미루기 일쑤였어요. 한 번쯤은 이직을 해보고 싶었는데 못한 게 너무 아쉬워요. 이직한 친구들을 보면 늘 부러웠어요. 그래서 주변에 이직을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빨리 하라는 조언을 종종 건네고는 했어요. ‘나는 늦었으니 너라도 살아’라는 의미와 함께요. 이직도 어느 시기를 놓치면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그렇게 한 회사를 오래 다니게 되었어요. 오랜 머물다 보니 회사에 대한 애정은 거의 사라지게 되고, 점차 지긋지긋하다고 느끼게 되었어요. 지금에 와서는 그때의 제가 조금은 미련해 보이기도 해요. 직장 생활이 만족스러웠던 건 아니지만, 어쨌든 저를 먹고 살게 해주던 곳이었잖아요. 그런데도 그때는 제 직업이 소중하다는 생각을 못했었던 것 같아요. 오히려 무의미하게 느꼈죠. 그래도 한 가지 마음은 있었어요. ‘내가 그만둘 즈음이면 적어도 사람들이 ‘이 사람은 할 만큼은 했구나’라고 생각하겠지’라는 생각 하나로 열심히 일했어요. 위로 올라가지는 못했지만, 제 기준에서는 충분히 최선을 다해 일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만둘 수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저는 제 직업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단지 밥벌이 정도로면 여겼던 거죠. 여기서 뭘 더 해보이겠다, 더 이루어보겠다, 그런 마음이 거의 없었어요. 매일을 해내긴 했지만, 그냥 통과해버린 시간들이었어요.
여섯 번째 장: 예술에 대하여
저는 키가 늦게까지 컸어요. 대학생 때까지도 키가 계속 자랐어요. 발육이 늦었던 거죠. 그 시절엔 한참 외국 배우 중에 브룩 쉴즈(Brooke Shields)가 유명했어요. 책받침으로도 자주 보이던 배우예요. 그 배우가 190cm까지 컸기에 거인병에 걸렸다는 말이 한때 나돌았었어요. 제가 대학교 1학년쯤 되었을 때고 계속 키가 크니까 혹시 나도 같은 병에 걸린 거 아닐까 할 정도로 걱정하기도 했어요. 그때 저는 좀 특이하고 싶어했어요. 지방사람인 제게 서울은 새로웠어요. 항상 서울에 가면은 우리 동네에는 없을 것 같은 것들을 구입을 했어요. 제가 키가 커서 어떤 치마를 입어도 미니스커트 같은 거예요. 그때는 날씬했어서 미니 스커트를 입고 다니면 주변에서 미스코리아를 나가보라는 주변 사람들의 얘기를 자주 들었어요. 예쁜 기준보다는 키만 크기만 해도 대회에 나가보라고 했을 때였기도 해요. 머리카락 색도 원래 밝아 눈에 더 잘 띄였어요. 그러다 회사를 다니면서부터는 제 개성을 누르게 되었죠. 저희 남편도 저와 비슷하게 특이해요. 예를 들자면, 남편이 저에게 “나는 네가 (이런) 부츠를 신고 다니고, (저런) 옷을 입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는데, 전혀 지금의 제 나이에 맞지 않는 것들이에요. 이런 얘기를 꽤 많이 했어요. 만약 제가 대학생이었다면 가능했겠지만, 지금의 나이에 입는다면 생뚱맞아 보일 것 같거든요.
저는 무용을 하고 싶었어요. 고등학교 때 일주일에 몇 번 없던 무용 시간이 그렇게 재미있었거든요. 적성검사를 하면 항상 예술, 연애, 문화 쪽이 나왔어요. 특이하게도 우리 집은 한 명도 그런 사람이 없었어요. 언니 오빠들은 모두 이과로 진학했고, 그러다보니 나도 그 길을 따라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스스로 선택하기보다는 늘 따라가는 쪽이었던 거죠. 어렸을 적 오빠의 웅변을 잠깐 들어본 적이 있어요. 우리 집이 1남 4녀인데 오빠가 장남이에요. 집안에 남자가 한 명이기도 하고, 남자라서 그런지 어머니께서 웅변을 잠깐 시켰어요. 오빠가 웅변 대회를 나가면 나는 관객석에 있는데 내가 일어나 가지고 앞에서 애국가 지휘하고 그랬거든요. 저는 애국가가 나오면 지휘하는 걸 보고, 그다음에는 따라 해보는 거죠.
그리고 어른들이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하는 끼가 좀 있었나 봐요. 크고 나니 마음은 있지만 부끄러워서 못 하겠는데, 초등학교 5, 6학년 때는 합창단을 들었어요. 독창 대회에 나가고 싶어 참가해 보았는데, 거기에 계셨던 선생님께서 “너 합창단 들어올래?” 물어보셔서 합창단에 들어갔어요. 합창단은 같이 부르는 거잖아요. 나 혼자서 부르지 않아도 되니 덜 부끄러워 좋았어요. 그러니까 제 안에는 예술저인 성향이 조금씩 있었던 것 같아요. 조금씩이지만 뭔가 예술 계통의일에 참여해왔어요. 하지만 제 마음속에는 늘 ‘우리 집에는 돈이 필요하니 안 해’라는 스스로의 벽이 있었어요. 피아노도 늘 배우고 싶었어요. 피아노를 평생 못 쳐봐서 사회생활 할 때 피아노를 배워봤는데 그때는 게을러지고, 생각대로 되지 않아 오래하지 못했어요. 한 일 년은 배웠어요.
저는 제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너무 힘들어했어요. 미술 같은 경우가 특히 그랬어요. 내가 생각한 대로 그림이 안 그려지는 게 심리적으로 힘들었어요. 초등학교 1학년 때의 기억이 아직도 나요. 한 시간 안에 미술 작품을 그려서 제출해야 했는데, 저는 시간 안에 그림을 완성할 수 없겠는 거예요. 나는 아직 반도 못 그렸는데 다른 친구들은 다 했다고 제출하니 마음이 너무 조급해지는 거예요. 성격은 빨리 끝내야 하는 거죠. 그런데 실제로는 그게 안 되니까, 그때부터 미술에 대한 기피증이 생긴 듯 해요. ‘나랑 미술은 안 맞아’ 라고. 미술 수업에서 포스터를 그릴 때는 선을 못 맞춰서 미칠 것 같았어요, 그러면서 다른 애들이 하는 걸 보는데, 잘하는 친구를 보면 또 속상해요. 그러면 집에 와서 우는 거죠. 제가 그렇게 우는 아이가 아니지만.... 미술 때문에 집에서 울었었죠. 그러면 큰언니가 “야, 붙어” 하면서 언니들을 모으는 거예요. 언니가 세 명이니까 집에서 그림 숙제를 할 때면 언니들이 다 해줬어요.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박에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있었어요. 박을 반으로 쪼개서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거였어요. 그걸 처음으로 제가 혼자서 해냈고, 좋은 점수도 받았어요. 그때 굉장히 기분이 좋았죠. 그 작품을 오랫동안 집에 두었고, 성인이 되고 나서도 가지고 다녔는데, 지금은 사라졌어요. 심지어 한문에도 미술과 같은 트라우마가 있었어요. 중학생이 되니 한문이 너무 어려워졌어요. 그랬더니 우리 언니가 “야, 연합고사에 한문은 네 문제밖에 안 나와. 그냥 네 개 틀려” 라며, 그런 해결책을 많이 줬어요. 연합고사에서는 다른 과목 공부를 열심히 하고 한문 네 개는 그냥 정답을 찍어서 틀리는 걸로 하라는 거죠. 그래서 한자 문제 네 개는 찍어서 냈죠.
대학 때 그런 것도 해보고 싶었어요. 그때는 일반인들도 아르바이트로 DJ를 많이 했거든요. 저도 방송쪽에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취재를 해보고 싶었는데, 도저히 용기가 안 나서더군요. 그런 것들은 한 번은 해봐야 된다고 생각하는 주의예요. 아이디어라는 게 있잖아요. 그때 떠올렸던 게 있었는데 그냥 지나가 버린 것들이 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 다른 사람을 통해 잘 되어 있는 걸 볼 때가 있어요. 예를 들면 유튜브요. 유튜브가 막 나오기 시작했을 때, 저희 남편이 그걸 맨날 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걸 왜 보냐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남편이 이 플랫폼이 나중에는 엄청 커질 것 같다며, 저는 아이디어가 많으니 한번 시도해보면 어떻겠냐고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부부 콘텐츠를 해보고 싶다고 했어요. 일상을 찍어보는 게 재미있을 것 같았죠. 지금은 일방 브이로그라고 하는 콘텐츠가 참 많잖아요. 그저 일상적인 이야기들인데, 나는 왜 그게 그렇게 재미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생각해봤던거죠. 하지만 남편은 자기 얼굴이 나가는 건 싫다고 했어요. 그 외 여러 가지 상황도 있었고요. 그래서 결국 아이디어에서 끝났어요. 저는 만약 한다면 정말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지만, 아무튼 못하게 되었어요. 진짜 좋은 콘텐츠였는데, 그걸 못하고 지나갔어요. 그렇다고 지금에와서 유튜브를 하겠다고 말하는 건 아니에요. 제가 유명인도 아니고, 지금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긴 해요. 그렇지만 그런 시도를 안 해보고 지나가면 나중에 후회한다는 생각은 있어요.
‘하지 않았다’라는 것은 제 삶에 꽤 많았던 것 같아요. 이제는 해봐야 후회를 안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요. 비록 실패하더라도요. 예를 들면, 예전에 영어 공부를 할지 고민을 한 적이 있는데, 해보지도 않고 ‘내가 공부를 어떻게 하겠어, 내가 영어를 어떻게 하겠어’ 하며 미리 겁을 먹고 있었던거죠. 그런데 아는 언니가 그런 저를 보며 내 돈 들여 영어를 배우는 건데, 못하겠으면 안 해도 된다며, 수업이 안 맞으면 다음부터는 안 나가면 된다, 아무도 뭐라고 안한다 라고 말해주었죠. “그냥 기회비용이라고 생각하면 돼”라는 언니의 말이 저에게 너무 필요한 말이어서 그 말을 적어두었어요. 언니는 그냥 획 던진 말이었겠지만, 저에게는 남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내가 크게는 못하더라도, 내가 시도할 수 있는 한두 가지는 해보려고 해요. 제가 하고 있는 재능기부 같은 거요. 저는 장애우분들게 책을 읽어드리는 일을 하고 있어요. 재능기부이지만 오디션을 보아야만 참여할 수 있어요. 경기도에서 하는 사업이고, 녹음은 수원에서 진행해요. 예전에는 주로 책 한 권을 녹음했는데, 책은 꽤 내용이 길어서 그분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듣기가 어려워요. 게다가 책 한 권을 다 녹음하려면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걸려요. 여러 명이 파트를 나누어 녹음할 수도 있지만, 혼자서 하는 경우 한 권을 모두 맡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들죠. 대신 소식지나 시사, 신문, 수필 같은 짧은 글이나 좋은 생각이 담긴 글 위주로 녹음하고 있어요. 예전부터 목소리에 관심이 많았어요. 학교 다닐 때 방송반도 조금 했고요. 그래서 남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어떻게 해야 귀에 쏙쏙 들어올까?’하는 생각을 가져요. 그런 데에 호기심이 있어요.
저는 제 스스로가 벽이라고 생각해요. 유튜브 이야기는 남편 핑계를 대긴 했지만, 사실은 제 스스로가 안 하기로 한거죠. 그 벽을 깨지 못하고 지내왔어요. 시원하게 한번 해볼 수도 있었을텐데도 막상 하려고 하면 선뜻 안 되는 거예요. ‘그게 과연 될까’ 싶은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무언가를 ‘한다’라는 것 자체를 두려워해왔어요. 그래도 책 읽는 모임이라던지 용기를 내었던 적도 있었어요. 무언가 새로운 변화를 바라고는 있지만, 새로운 게 막상 다가올 것 같으면 두려워했어요. 제가 학교 정례와 같은 거에 익숙한데, 정해진 틀이 있는 거를 편안해 하는 거죠. 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이로 인해 환경이 바뀌는 걸 굉장히 두려워 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게 제 벽이에요. 그래도 마음 한켠에는 여전히 무언가 해보고 싶다는 바램이 있어요. 그게 계속 남아 있으니 저를 조금씩 움직일 수 있게 하고 있어요. 누가 살짝 터치를 해줘야지만 하는 거 있잖아요. 저는 그런 식이었어요. 기회가 주어지면 그때 해보는 거죠. 혼자서 “제가 할게요” 하고 먼저 나서지는 못했어요. 홍보실에서의 일도 마찬가지에요. 저는 홍보 쪽에 관심이 있었어요. 기업 홍보실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제가 기회를 만든게 아니었어요. 직접 말해서 간 것도 아니었고요. 마침 누군가가 얘기를 듣고 저를 데려간 거죠. 그렇게 기회가 주어졌을 때는 정말 열심히 했어요. 제 역할을 잘 해냈어요. 내가 너무 하고 싶었던 걸 했던 그 시간이 너무 기억에 남아있어요. 그렇다고 홍보실에서 다른 부서로 이동했을 때 크게 아쉽지는 않았어요. 바뀐 업무에 적응을 잘했고, 또 성실했어요. 뭐든지 시키면 잘하고, 열심히 했어요. 그래서 아쉬움이 조금 있어도 괜찮았어요. 같이 일하던 사람들도 좋았고요. 제가 다니는 교회에서도 목소리로 봉사하는 게 있어요. 그런 일도 하고 있고요. 기회가 닿아서 해봤는데, 기대보다 재미있어요.
회사를 다니면서 제 개성이 눌리기는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예술적인 감수성이 아직 남아 있다고 느껴요. 그래서 예술과 관련한 기회가 있으면 학교라도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요.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할 때가 있어요. 그런데 또 막상 하려고 하면 스스로 생각을 접기도 하고요.
일곱 번째 장: 사회적 존재
사람을 좋아해요. 쉽게 사람을 사귀지는 못하지만 좋아해요. 상처를 많이 받았었고 그럼에도 회복해서 또 사람을 만나고 싶어해요.
결혼
신랑은 소개팅으로 만났어요. 처음에는 성향이 너무 다르고 안 맞는 사람이었어요. 그래도 만나게 되었고, 힘들었어요. 이렇게 서로 안 맞는데도 저는 상대방에게 맞추어서 이 상황이 편안해진다면 괜찮다는 생각으로 대했죠. 그게 어느 순간 한계가 오더라고요. 이게 가족관계로 확장되면 부모, 자식, 형제자매까지 관계들이 늘어나게 되다보니 이 모든걸 맞춰주는 게 점점 지쳐가고 소진되는 느낌이 있었어요. 그래도 배우자랑 평생 살기로 하고 부부가 된 거라, 그냥 살아져요, 그만 함께 살아야 하나, 또는 관계가 힘들다 같은 생각도 몇번 했었어요. 종교적인 도움인지 시간의 흐름인지 모르겠지만 신랑이 조금씩 바뀌면서 제 숨이 트였어요. 부부로 지내면서 고쳐지지는 않지만 서로 맞추어가는 과정들이 있었어요. 저는 결혼을 아주 늦게 했고, 결혼을 너무 하고 싶었어요. 결혼은 마음먹으면 되는 줄 알았고, 때가 되면 물 흐르듯이 되는 줄 알았어요. 우리 언니들도 그렇고 제 주변 사람들이 다 결혼했는데 유독 저만 40대가 되도록 결혼이 안 됐어요. 그래도 포기하지는 않았어요. 20대 때부터 결혼하고 싶었고, 한때는 이렇게까지 결혼이 안 될 수가 있나 싶었어요. 그래서 나중에는 조건을 다 내려놓았죠. 젊을적엔 제가 눈이 높다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나중에 결혼할 때는 눈이 너무 낮다고 말이 바뀔 정도로요. 기준을 낮춰보기도 했는데 잘 되지 않아 어느 순간부터는 소개팅도 싫어졌어요. 누굴 만나도 그놈이 그놈이다 싶은 지경이 올 정도로 수많은 소개팅을 했어요. 그렇게 자포자기 상태였을 때 지금의 남편을 소개받았어요. 원래는 첫인상이 별로면 애프터도 나가기 싫었는데 그때는 싫더라도 세 번은 만나보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그놈이 그놈이라는 생각으로 나간거죠. 처음 만난 남편의 인상은 정말 별로였고, 행색도 별로였어요. 본인도 알고 있을 정도예요. 그래도 스스로의 약속대로 두 번, 세 번 만나면서 얘기를 나눴고, 이후로 계속 만나게 됐어요. 그 가운데 매력을 느꼈다기보다는 그냥 계속 만나게 된 거죠.
남편은 저보다 나이가 많아요. 저를 만난 지 얼마 안 되어서 결혼하자고 했어요. 저는 연애를 오래 하고 싶지 않았어요. 빨리 결혼하고 싶었어서 오늘이라도 당장 결혼하자고 말해주는 사람을 바랐는데, 생각보다 빨리 결혼 얘기를 해주니 너무 좋았어요. 하지만 그떄는 확신이 없다 보니 당장 하기보다는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싶다고 말했죠. 속으로는 만세를 부르긴 했는데, 또 어디서 들은 건 있다고. 사람은 사계절을 만나봐야 한다는 말을 떠올려 시간을 가졌죠. 제가 어느 정도 마음의 결정을 내렸을 때 즈음 남편은 처음과는 달리 질질 미루는 거예요. 그런 꼴을 못 보겠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제가 빠르게 진행했어요. 결혼은 만난 지 거의 1년 3개월 만에 했어요. 원래는 꼼꼼하고 차분하게 결혼 준비를 하고 싶었는데, 당시에는 결혼 시기를 놓치면 끝이라는 생각에 정말 신속하게 준비했어요. 이번 주에 결정하고, 다음 주에 결정하고, 이것도 결정, 저것도 결정하며 주도적으로 결혼식을 준비했어요. 결정 장애라고 부를 정도로 평소에는 결정을 잘 못내리는 사람이 그때는 제 인생 중 역대급의 에너지를 쏟아 모든 것을 결정했어요.
신혼집은 풍덕천동에 있는 초입마을이었어요. 이후 동천으로 옮겼다가 최근에는 대장동 쪽으로 옮겼어요. 당시 KT 본사가 분당 정자에 있어서 출퇴근 때문에 용인을 선택했어요. 이제는 전체의 3분의 2 정도의 직원이 광화문으로 옮겼지만요. 원래 분당이 중심이었는데, 수장이 바뀌면서 광화문으로 이동했어요. 풍덕천동에 KT 직원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본사가 갑자기 광화문으로 옮겨지니 이 지역이 한동안 혼란이 있었어요. 직원들이 출퇴근 문제를 따지니 서초에 있는 새 빌딩에 높은 임대료를 내고 임시 사무실로 제공하기도 해서 한때는 그곳으로 출퇴근을 했었어요. 저는 당시 현장으로 발령 받아서 나와 있었기에 본사 위치가 옮겨진 것에 큰 상관을 하지 않았다가 나중에는 가게 됐어요.
혼자 살 때는 분당에도 살아 본 적이 있어요. 분당에서 혼자 오피스텔이나 원룸을 구해보기도 하다가 한계치에 이르러 더 이상 분당에서 살 수 없게 되었어요. 매번 대출로 계약해왔는데 이번에는 풍덕천동으로 옮겨 좀 더 안정적으로 머무를 수 있는 전세를 알아보기로 한거죠. 은행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회사 셔틀이 풍덕천동으로 와서 그곳에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어요. 주변에서 원룸에서 어떻게 아파트로 갔냐고 물어보면 은행에다 말하면 된다고 답하적도 있어요. 회사 셔틀이 풍덕천동으로 와요. 다른 곳으로 가면 셔틀 위치가 애매모호하니 이곳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었어요. 결혼 후에 풍덕천동에서 잠시 같이 살다 근처로 옮겼는데 그곳이 동천동이었어요. 일하는 동안 본사가 수원에서 분당으로, 그리고 광화문으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그 즈음해서 2년 정도 마음을 정리한 후 퇴사했어요.
조립식 가족
저희는 조립식 가족이에요. 드라마나 연극에서 조립식 가족이라는 말을 들어봤을 거예요. 우리 가족은 피를 나눈 가족이 아니에요. 스물 네 살 청년인 아이가 있는데 요즘 저를 속상하게 해요. 이게 부모의 마음인지, 독립심 문제인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고민하는 게 저만의 마음인 건지, 내가 교만한 건지, 아니면은 모든 부모가 겪는 건지 모르겠는 거예요. 지금 제 눈앞의 가장 혼란스러운 문제는 그거예요. 아들은 독립해서 혼자 살고 있어요. 연락이 잘 안닿는데, 나이도 그렇고 MZ세대 중 가장 젊어서 그런가 싶기도 해요. 연락받고 싶으면 받고, 아니면 안 받고 하죠.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면 분명 본 것 같은데 읽음 표시(1)를 없애두지 않고.... 그런 게 눈에 보이니 기다려주어야지 하면서도 속에서는 천불이 올라오는 거예요.
큰아이가 어떻게 오게 되었냐면, 어는 순간 ‘자립준비청년’을 알게 되면서부터예요. 자립준비청년이란 보육원에서 고등학생까지 지내다가 스무 살 성인이 되면 시설을 나오게 되는 아이들을 말해요. 지금은 법이 바뀌어 보육원에 좀 더 머물 수 있다지만, 보통은 스무 살이 되면 나와요. 시설에서 퇴소할 때 나라에서 천 만원에서 천오백 만원 정도 지원금을 받는다고 해요. 봉사활동을 하면서 청년들에게 관심이 점차 생겼고, 교회에서도 청년들을 대상으로 멘토링을 하다 보니 이 과정에서 ‘내가 청년이라면 대화할 어른이 있었으면 좋았겠다’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어요. 예를 들면, 직장 생활할 때 회사를 어떻게 다니지, 회사를 그만둬야 하나 등의 쓸데없는 고민을 많이 하게 되잖아요. 이런 고민이 있을 때 누군가 옆에서 얘기를 해줬으면 그 시간이 덜 힘들었겠다 싶은 거죠. 마침 배우 신애라 씨가 자립준비청년을 대상으로 사역을 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마음에 확 들어왔어요. 이들이 제대로 독립하고 정착하는 게 힘들어요. 공동생활에 익숙하니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일상과는 다른 삶을 살아왔어요. 식판으로 밥을 먹었다보니 일반 가정에 오면 국그릇이나 밥그릇에 밥을 먹는 것이 어색하고, 전기요금 내는 것도 해본 적이 없고, 생활이라고 해봤자 빨래를 개는 정도만 해본 상태로 세상에 나오거든요. 나이만 먹었지 일상에서의 교육이 부족한 상태라 여전히 어른이 필요한 이들이에요. 사각지대에 있었던 아이들이었는데 언제부턴가 스무 살이 되면 투표권이 생기고 하니 정치권에서 자립준비청년 지원을 갑자기 많이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보니 큰 돈을 금방 날리는 아이들이 꽤 있다 해요. 또는 지원금이 있다는 걸 아는 나쁜 사람들이 아이들을 어둠의 길로 유도한다는 얘기도 들었었고... 그렇게 사정을 모르는 아이들이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고 해요. 그러면서 자립준비청년 멘토를 하자는 흐름이 생겼고, 교회에서도 찾아보니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모임이 있었어요. 그 모임은 외부 단체들과도 많이 연결되어 있었어요. ‘학교 밖 청소년’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시설을 퇴소한 아이들과 방치된 아이들-부모는 있지만 학대를 받거나 굶고 있는 아이들-을 데려다 밥을 먹이는 목사님도 계셨어요. 처음에는 깊이 들어가고 싶진 않았고 어느정도 적당한 위치에서 참여하고 싶었지만 나도 모르게 자꾸 그렇게 마음이 가더라고요.
그렇게 1년 2년 3년 해를 넘기면서 사역을 하던 중 저에게 멘토가 급히 필요하다며, 멘토를 맺어야 아이가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고 하니 마음이 조급해졌어요. 저는 아직 멘토를 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았고, 아이도 꼭 필요한지는 모르겠다는 분위기였는데, 급하다고 하니 서로 별로 원하지 않는 상태에서 멘토와 멘티가 되었어요. 그때의 아들은 이미 스무 살이 넘었고, 대학교를 다니고 있었어요. 자립준비청년이 대학을 간다는 건 쉽지 않기에, 대학을 다니기만 해도 대단한 아이라고 하더라고요. 몇 번의 만남을 이어가다 보니 저와 성격이 비슷하다는 걸 느끼게 되었어요. 아들이 저처럼 낯을 많이 가렸지만 친해지면 깊어지는 거죠. 처음에는 서로 대면대면해서 만날 때마다 어색했어요. 우리 집에 데려와서 재워도 어색하기만 했죠. 그러다 어떤 계기가 있었고, 아들이 어떻게 보육원으로 오게 되었는지 배경을 알게 되면서 본인 얘기를 깊이 하게 되었어요. 요즘의 보육원 아이들은 고아보다는, 대부분 부모가 있지만 맡기는 형태예요. 그렇게 관계를 이어오던 중 처음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남편도 제가 계속 하다보니 궁금해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나도 함께 하고 싶어, 당신이 하는 건 반대 안 해”로 바뀌었어요. 아들이 우리 집에 오고 하다 보니 남편도 마음을 열게 된거예요. 아무래도 스무 살 전후면 자기 사고와 의지가 생기니 관계 맺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갑자기 친하게 지낼 수는 없고, 긴밀한 유대가 없기도 하니 시간이 엄청 걸려요
그리고 중학생인 아이가 있어요. 지금은 잠시 쉬고 있는 사이예요. 우리 집이 너무 심심해서 안 온다고 하더라고요. 처음 만난 건 아이가 4학년 때였어요. 보육원에서 우리랑 처음 만났어요. 목사님께서 연결해 주셨어요. 우리 집에 자주 와서 자고, 밥도 먹고, 같이 시간을 보내곤 했어요. 결연식을 위해 같이 옷을 맞춰 입고 간 적도 있어요. 그렇다고 계속 함께 생활한 건 아니에요. 아이가 우리 집에 오는 시간들이 있었어요. 이 아들의 마음을 열기까지는 제 성향과는 상관없이 계속 쏟아부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마음이 열리면 좋은데, 안 열리면 그게 또 너무 괴로운 상황이 되는 거죠. 어느 때는 ‘이런 건 하지 말자’ 싶은 순간도 오고요.
위탁보육의 한 형태였는데, 보건복지부에서 조사한 바로는, 선진국 중에서 보육원이 남아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라고 하더라고요. 대부분은 위탁보육 시스템이라 해요, 그래서 우리나라도 보육원을 점차 없애야 한다는 입장이에요. 당장은 없앨 수 없으니 아이들을 가정에서 체험하게 해보는 방식을 시범적으로 도입한 게 이거예요. 한번 체험해보고, 괜찮으면 입양이나 위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요. 그런데 국내에서는 이걸 맡을 곳이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결국 교회에 요청이 들어갔고, 마침 우리 교회에 입양 홍보회 회장님이 계셨어요. 그리고 저는 그분과 예전부터 이런 사역을 같이 하고 있었어요. 그렇게 해서 총 세 가정이 선정되었고, 저희 집도 그 중 하나였어요. 집에 아이들이 다 크고 독립했으니까요. 그래서 아들이 우리 집으로 오게 되었어요. 들어보니, 어렸을 때부터 외로움을 많이 탔다고 해요. 그래서 남자 아이지만 여자 아이들 방에 가서 놀곤 했다고 하더라고요.
먼저 가정 실태 조사를 한 후 아이들을 보냈는데 생각보다 결과가 좋지 않았어요. 아들은 에너지가 200%인 거예요. 1분 1초를 혼자 놀지를 못해요. 우리 집은 아무래도 조용한 시간이 많잖아요. 아이에게는 너무 심심한 거예요. 이를 가정 체험이라고 했는데 목적은 집에서 함께 일상 생활을 경험하는 거였지만 아이는 집에 있고 싶지 않아 했고, 계속 밖에 나가 놀고 싶어했어요. 축구도 하고, 물놀이도 하고 싶어했어요. 그걸 우리가 다 맞춰줄 수 없다 보니 설명을 해주기도 했는데 아이가 서운해했죠. 그리고 경험이 많지 않았어요. 주말마다 아이를 데리러 갔다가 시간을 보낸 후 돌아가는 데, 만일 차가 많아 길이 막히는 경우 아이는 그걸 견디히 힘들어했어요. 제가 견뎌야 한다, 다른 도로도 마찬가지로 차가 많다고 말해주면 바로 화를 낼 정도로 인내심이나 감정 조절에 대한 훈련이 안 되어 있는 거예요. 그렇게 몇 번을 보내다가 아이가 “나는 그 집은 안 가요, 심심해요.”라고 말한거죠.
작은 아이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쩜 이리 예쁠 수 있을까 싶을정도의 감정을 느꼈어요. 큰아이를 더 오랫동안 만나왔고 더 마음에 품었는데도 거리감이 있는데, 이 아이는 제 마음 안으로 쑥 들어온거죠. 그래서 가고 싶지 않다는 아이의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3개월을 내내 울었어요. 너무 속상했고, 아이를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아이가 싫다고 하니 시간을 줘야 했어요. 억지로 만날 수는 없으니까요. 그때 남편이 “아이가 커서 나중에 또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되면 되지 않겠냐”라고 저를 설득했고, 그렇게 넘어갔어요. 그때 남편이 굉장히 이성적이라 생각했어요.
그 시기는 제가 몸이 조금 아플 때라 마음도 약해져 있었고, 그렇기에 더욱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어요. 아이랑 함께 있을 때 너무 기뻤거든요. 큰 아이랑 같이 물놀이를 간 적이 있었는데 그걸 쳐다보고만 있어도 몸이 치유되는 느낌이었어요. 너무 행복하더라고요. 그런데 아이가 그렇게 말하니 상실감이 너무 컸어요. 내가 잘못한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뭘 잘못했나 자책하게 되더라고요. 그래면서 이제 당분간 쉬기로 하면서 직접 만나는 건 멈추고 모임 지원만 계속했어요. 그 과정에서 참여하는 가정은 많이 늘어났거든요. 해당 프로그램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어요.
그러면서 제 비전이 바뀌었어요. 큰아이보다는 유소년기에 있는 아이를 만나서 어렸을 때부터 가정생활을 체험하게 해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면 나쁜 길로 빠지지도 않고, 유대 관계도 더 좋아지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짜 엄마 아빠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모나 삼촌 정도가 될 수 있겠다고 봤고, 여기에 희망을 많이 가졌어요.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어려워요. 제가 아이를 종일 책임지고 돌보는 게 아니라 한 달에 한두 번, 어린이날 같은 날 만나고 하는 방식이거든요. 그러면 아이가 과연 그 가정에 있고 싶어 할까 하는 걱정을 해요. 그런데 오히려 아이들은 자기 집은 따로 있다고 생각하더라고요. 그 점은 좋았어요. 그렇게 이 아이를 만나게 되었고, 큰아이도 그걸 이해했어요. 자신도 어렸을 때 그랬으니까요. 둘이 같이 잘 지내기도 했는데, 큰아이가 바쁘다 보니 계속 이어지지는 않았어요. 그건 아쉬운 부분이에요. 그래도 둘이 같이 놀던 사진들을 보면 아직도 기뻐요. 지금 봐도 너무 예뻐요 큰아이 같은 경우는 그 뒤로 조금 더 가까워졌어요. 어느 순간 아이가 저를 ‘엄마’라고 부르고 싶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엄마가 되었죠. 그때는 정말 너무 감격스러울 정도로 눈물이 나고, 자다가도 일어나서 너무 행복하다고 소리지르기도 했어요. 하지만 요즘은 말도 안듣고 하다보니 마음 속에서 천불이 나고 있어요. 큰아이 생각만 하면 신경질이 날 때도 있어요. 그러면 또 ‘내가 얘를 미워하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거나, ‘내가 원해서 하는 건데, 이게 학대처럼 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한국의 입양시스템은 굉장히 까다로워요. 특히, 정인이 사건 이후에는 더욱 까다로워졌어요. 그래서 입양을 하려다가 마음이 상하는 경우도 있어요. 절차가 너무 까다롭다고 느껴지니까요. 큰 아이들을 입양하는 건 특히 어려워요. 이들과는 신뢰를 쌓는 시간도 오래 걸리기도 하니까요. 후원자라는 것도 있어요. 우리가 해외 아이들에게 보내는 후원금과 같이 금전적으로 지원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애정이거든요. 후원도 물론 쉬운 건 아니지만 얼굴을 직접 보고 마음을 맞춰가는 게 훨씬 어렵다고 느껴요. 직접 겪어보면 소진이 커요. 그러다보니 다른 사람들에게 한번 해보라고 쉽게 말할 수가 없겠더군요. 있는 게 아니에요. 이제는 이런 저의 봉사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조심스러워요.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도움이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이 많으니 이런 활동이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내 스스로가 많이 소진이 되고 아까 말했던 것과 같이 허무함을 느낄 때고 있다보니 말하는 게 어려워지는 거예요. 괜히 내가 자랑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또 내 마음은 지금 엉망이지만 겉으로는 선한 마음으로 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까요. 특히 큰 아이에 대해서는 요즘 미운 감정까지 생겨서 말을 아끼게 되어요.
가정 교육이라는 게 사실 앉아서 가르치는 게 아니잖아요. 밥 먹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먹지 마’라고 말할 수도 있듯이 일상 속에서 배워가는 건데, 그런 걸 한 번도 겪지 못한 아이들에게는 1부터 10까지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하지만 그 아이는 그걸 그거 받아들이지 않고 비난이나 부정으로 느낄 수 있어요. 실제로 해보니 이런 부분이 어렵더라고요. 아이 입장에서는 본인은 착한 아이라는 말을 들어왔는데 왜 야단을 치는 걸까 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거죠. 이러한 부분도 진짜 아이에 대한 관심이자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하는 말인데 그렇게 받아들이니 더욱 조심스럽게 대하게 되어요. 엄마와 자식 관계가 완전히 형성된 상태가 아니다보니 제 입장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를 때가 있어요. 그럼에도 관계가 쌓이다 보니 아이에게 ‘엄마’라는 부를 수 있는 사이가 된 거죠.
요즈음에는 자립준비청년을 위한 지원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실제로는 작은 아이와 같이 어린 학생들, 또는 그보다 더 어린 아이들 중에서도 어려운 아이들이 정말 많다는 걸 느껴요. 위탁이 좋은 제도라고는 생각하지만, 떠나보낼 때는 나도, 아이도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위탁을 오래 한 분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점차 떠나보내는 과정에 익숙해지고, 그 안에서도 기쁨을 느낀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위탁 교육을 받아보긴 했는데, 제가 할 수 있을까 하면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위탁은 거의 입양과 같이 하루 24시간을 다 투여해야 하는 거니까요.
남편은 처음에는 제가 보육원 아이를 받아들이는 것에 마음이 편했던 건 아니었을 거예요. 하지만 제가 계속 이어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함께 하게 되었고, 지금은 그 안에서 마음이 많이 열렸어요. 그런 점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얼마 전 입양 홍보를 하시는 분께서 저에게 어떤 제안을 주셨어요. 어떤 일을 하나 맡아서 했으면 좋겠다는데, 저는 결국 안 하겠다고 말했어요. 여태까지는 거의 다 ‘오케이’ 해왔는데 갑자기 안 하겠다고 하니 의외였나 봐요. 저는 솔직하게 말씀드렸어요. 지금 제 마음 상태가 이러하고, 그렇기에 헐 수가 없다고요. 도저히 뭘 할 수 있는 마음이 안 생긴다. 아예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다고요. 그래도 여전히 가정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많아요. 예전에는 아이였다면, 지금은 부부에 더 관심이 있어요. 남들은 제 관심사가 자주 바뀌냐고 물어볼 수 있겠지만 큰 테두리 안에서는 ‘가정’이에요. 나라가 회복하지 못하거나 균열이 나거나 하는 일들이 잦아지는데 저는 그것이 가정의 평안과 회복을 통해 나아질 수 있다 보고, 굉장히 중요하다고 보아요.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자랐고, 어렵게 가정을 이루었다 보니 가정에 더욱 마음이 가요. 그러다보니 힘들게 사는 과정을 보면 저도 너무 힘들어 해요.
부부 상담
최근에 법원 가기 직전까지 간 부부가 있었어요. 너무 힘들어하는 둘을 보고 관계가 회복되길 바라며 우리 집에 초대하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만들어 보았어요. 아내 분은 잘 극복해보고 싶어했지만 남편 분은 너무 폐쇄적이었어요. 만나서 싸우든 대화를 하든 둘 사이에 뭔가를 해야 변화가 생기는데, 그냥 완전히 닫혀 있었어요. 그걸 보면서, 예전에 목사님이 제게 해주셨던 것처럼 옆에 있어주는 것 말고는 해줄 게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끝까지 곁에 있자, 그런 마음을 먹었어요. 제가 즐겨보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이혼 숙려 캠프’예요. 별별 부부들이 나오는데 그 프로그램을 통해 회복되는 과정을 보거든요. 실제로도 주변에서도 그런 부부들을 봤고, 고백을 하는 과정을 통해 회복되는 걸 봤었기에 희망을 가지고 접근도 해봤지만, 이 부부의 경우는 잘 안되었어요. 저는 전문가가 아니다보니 처음에는 부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편을 들어줄 수 있는 건 들어주고, 자주 만나서 ‘당신만 그런 게 아니다’라고 많이 위로해 주기도 했어요. 그런데 나중에는 남편 분께서 ‘그건 다 거짓이었고, 당신들은 한통속’이라는 식으로 나온 거예요. 우리 말고도 다른 분들도 그 부부를 위해 진심으로 대했지만, 그렇게 받아들이니 안타깝더라고요. 그렇다고 그분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지만 잘 해보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들었었죠. 결론적으로는 함께 있어 주는 수밖에 없었어요. 힘들면 찾아오라고, 우리가 가끔 찾아가겠다고 말하며 그렇게 정리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다른 사람이 힘들어하는 걸 보면 마음이 쓰여요. 공감하고 위로해주고 싶어 하는 편이에요. 가끔은 이게 오지랖인가 싶을 때도 있는데, 돌이켜보면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성향인 것 같아요. 어머니도 남이 힘든 걸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이었거든요. 저도 그래요. 제가 해결해 줄 수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상하게 자꾸 관여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있어요.
여덟 번째 장: 봉사하는 삶
제 안에 봉사 DNA가 있다고 생각해요. 봉사에는 적극적이게 되어요. 꼭 물질적인 게 아니어도, 심적으로 여러 가지 힘든 일을 경험해 봤잖아요. 그래서 늘 ‘나는 케어를 받아야 하는 사람’, 또는 ‘나는 어렵게 살아왔다’, ‘나는 시련을 많이 겪었잖아’ 등의 생각을 많이 했어요. 생각도 많았고, 또 그걸 기록하는 방법으로 되새김질도 했어요. 그러다가 봉사를 하면서 이런 생각이 조금씩 바뀌어갔어요. 예전에는, 어떤 계기나 도전을 받아 삶이 확 바뀌는 사람들이 가장 부러웠어요. 나는 아무리 도전을 하거나 자극을 받아도 그 순간으로 끝나더라고요. 그런데 봉사는 이상하게 움직여졌어요. 다른 사람의 삶에서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부분에서는 적극적이었어요.
선교를 가게 된 것도 한 번 해볼까 하던 찰나에 이야기가 들어와서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한 번 발을 디디면 여기저기로 손이 뻗쳐 가더라고요. 그렇게 봉사를 이어오면서 제 자신도 조금 더 밝아졌어요. 대상에 대한 관심도 생겼고요. 어린아이들에게 관심이 가기도 했고, 청년들과 지내다 보니 청년들의 고민에도 귀 기울이기도 하고요. 직장생활에 대한 이야기나 고민은 저도 경험한 거고 공감할 수 있으니 이야기해 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이 좋아했어요. 20대나 30대의 아이들은 엄마나 아빠 외에는 어른을 만날 기회가 많지 않으니까요. 제가 어른으로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요. 어떤 솔루션을 주지 않아도 아이들이 좋아해주었어요. 그런 건 얼마든지 할 수 있더라고요.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이고요.
부부 사이의 관계 또한 제가 직접 경험하고 있으니까요. 결혼을 하고 가정 생활을 해보니 쉽지 않다는 느꼈어요. 행복을 바라며 결혼했어도 그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찾다 보니 치유 같은 과정에 닿게 되었어요. 내가 그들을 돕는 것은 물론, 그런 과정을 함께 하면서 나도 회복되어가는 가는 거예요. 그래서 그쪽에 관심이 더 생겼어요. 이혼 위기에 놓인 부부를 대상으로 관계 회복을 찾아보는 ‘이혼 숙려 캠프’ 프로그램이 처음에는 우울해서 잘 안 봤는데, 제 관심과 연결되다 보니 점차 보게 됐어요.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부부 상담가나 변호사들이 하는 말이 좋더라고요. 참여하는 부부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답답해지기도 하지만 이들의 회복 과정을 통해 다른 비슷한 가정에도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해요. 참가자들이 관계를 회복하고자 부끄러움에도 얼굴을 드러내고 나오잖아요. 그러한 결심이 대단하다고 느껴요.
우리는 모두 사회적인 존재라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 다는 건 너무 감사하고, 그래서 나도 해줄 수 있다면 해주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해요. 만약 저에게 가족이 되어줄 수 있냐고 묻는 다면 가족이 되어줄 수 있어요. 부재했을 때의 그 힘듦을 알겠으니까요. 어떨 때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라는 느낌이 들때도 있어요. 제 자신이 하찮은 벌레와도 같다고 생각할때가 있거든요. 그런데 또 어떤 일을 성취하면 ‘내가 이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닌가’라고 생각할 때도 있어요. 그러다 나눔을 위해 사람들을 만나고, 또는 누군가를 섬기는 자리에 가다 보면 ‘나는 진짜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생각에 다시 잠겨요. 황가람의 ‘나는 반딧불’이라는 노래를 좋아하는데, 가사가 나는 대단한 줄 알았으나 희미한 존재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어떻게 쓰였는지를 알겠더라고요.
생각이 한 번 크게 꺾이는 시기가 최근에 있었어요. 그 시작은 필리핀의 한 마을에서 만났던 그 어린아이였어요. 아이의 인생이 똑같은 환경에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많이 봤어요. 드라마를 볼 때도 진지하게 보는 것 중 하나에요. 극 중 인물이 어떤 상황에서 누구를 만났느냐에 따라, 그리고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삶의 이야기가 달라지잖아요. 예를 들면 똑같이 어떤 우울한 사건을 대했을 때, 어떤 캐릭터는 낙심을 한다면, 어떤 캐릭터는 세상에 나가서 직접 부딪히고 극복을 하겠다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잖아요. 드라마 ‘도깨비’에서도 주인공이 학대하는 이모를 두고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잖아요. 그런 게 동화 속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봉사를 다녀보니 그런 모습을 많이 보게 되었어요. 실제로 그러한 것들에 관심이 생기니 눈길이 자꾸만 가고 자주 보이게 되었어요. 예를 들면, 해외에 계신 선교사님이 한국에 오면 머무를 곳이 없어요. 선교사님뿐만 아니라 집이 없는 아이들도 많고요. 한 선교사님께서 교회 프로그램으로 아이들 몇십 명과 함께 한국에 왔는데 머물 곳이 없었어요. 그런데 어떤 분이 원룸 건물을 지어두고, 아직 분양 전인 그 공간을 선교사님들께 내어주셨어요. 그분의 도움이 너무 인상 깊었어요. 나도 그런 걸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내용을 들으면 보통은 금전적인 부분을 떠올리면서 ‘나는 못해’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저는 꼭 지금 당장 이룰 수 있는 게 아니어도, 그냥 꿈을 가지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분의 모습도 그렇고, 저는 드라마에서도 많은 자극을 받아요.
감동 깊게 봤던 드라마도 있었어요. 형편이 다른 두 집안 이야기였는데, 보육원에 있는 예쁜 여자 아이가 있었고, 부잣집에서 후원을 하러 자주 찾아왔어요. 그 집 아들이 그 아이에게 항상 “예쁘다”라고 말해주었는데, 어느 날 그 아이가 혼자 그네를 타며 슬퍼하고 있었어요. 그러자 남자 아이가 다가가서 왜 그렇게 슬퍼하는지를 물었더니 그 아이가 말하길, ‘당신들은 결국 돌아가잖아요, 나는 늘 여기 혼자 남아 있어’ 라는 뉘앙스의 대답을 한 거죠. 그러자 남자아이는 “내가 이제부터 네 가족이 되어줄게”라고 말했는데, 오래된 장면이지만 제 가슴에 확 들어와 지금까지도 강하게 남아있어요.
필리핀 무덤 마을과 마빈
2009년 즈음에 아무 생각 없이 해외 선교를 따라간 적이 있어요. ‘컴패션’이라는 NGO 구호 단체를 통해 갔는데, 그곳이 필리핀에 있는 이른바 ‘무덤 마을’이라는 곳이었어요. 그곳은 너무 가난해서 시멘트로 무덤을 만들어 시신을 넣어요. 한 3개월 지나면 시신이 썩잖아요. 그러면 그 위에 다시 무덤을 쌓고, 또 시간이 지나면 그 위에 집처럼 구조물을 만들어 사람들이 살아요. 이해가 잘 안될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는 집 형태가 아니고, 진짜 무덤 위에 집이 있는 거죠. 그래서 ‘무덤 마을’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일행을 따라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러 갔어요. 그 중 한 조그만 아이가 계속 우리 일행을 따라다녔는데, 자세히 보니 온몸에 화상을 입고 있었어요. ‘마빈’이라는 이름의 아이였고, 무덤 마을에 화재가 났을 때 다쳤다 해요. 하지만 그 아이 표정이 너무 해맑았어요. 보는 우리는 마음은 아픈데, 아이는 그냥 웃으면서 따라다니는 거예요. 외지인이 왔으니까 그냥 호기심에 따라다니는 거였을 거예요. 거기에서 우리는 아이들에게 풍선 만들어주고, 페이스페인팅 해주고, 같이 놀아주고, 기도해주었어요. 4박 5일 정도 머물면서 아이들과 놀고, 기도하고 시간을 보냈어요. 텔레비전에서 연예인들이 해외 선교지에서 아이들 돌보는 장면을 보신 적이 있을 거예요. 처음 방문에는 눈물이 엄청 나는데, 여러 번 가 보면 눈물이 쉽게 나지는 않아요. 대신 마음이 아파 와요. 그 아이를 보면 눈물이 난다기보다는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어요. 계속 마음속에 남아 있는 거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도 그 아이의 모습이 제 마음에 오래 남았어요. 제가 마음속에 묵혀 두고 있던 상처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 위에 알코올을 붓는 것처럼 아픈 느낌이 들었어요. 어떤 상처는 오래 숨기고 살다 보면 곪기도 했다가, 또 괜찮아지다가를 반복하잖아요. 그런 데 그 아이를 보고 나니 그 상처에 알코올이 확 뿌려져서 아예 도려내지는 작업을 당한 느낌이 들었어요. ‘알코올을 바른 것 같다’ 라는 말이 떠올랐어요. 제가 가지고 있었던 상처는 어렸을 때의 힘들었던 환경이나, 누군가의 죽음 같은 것들이었어요. 그런 것들이 제 마음 안에서 계속 남아 힘들게 했어요.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그 부분을 생각하게 되었어요. 내가 왜 위축되어 있었는지, 어떤 감정이 나를 어렵게 만들고 있었는지, 그 환경의 영향이 무엇이었는지를 계속 짚어보며 생각했어요. 일기를 쓰면서 그런 생각들을 많이 정리할 수 있었어요.
다녀와서는 이 기록을 남기고 싶다, 여기 사람들에게도 알리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 당시 제가 컴패션의 일반인 홍보대사를 했어요. 저희 교회와 컴패션이 함께 한 거라 교회분들이 많이 참여했었고, 그렇기에 다녀온 뒤에는 교회에서 사진전을 가질 수 있었어요. 현장에서 찍은 사진들로 패널을 만들고, 컴패션 홍보대사로 매거진 인터뷰도 했어요. 후원자와 아이가 어떻게 만나고, 어떤 인연이었는지 보여주는 전시였어요. 후원자들의 얼굴과 후원받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어떤 사연을 가지고 만났는지, 지금은 어떻게 후원하고 있는지의 내용을 함께 담았어요.
여기에서 제가 결연했던 아이들도 있었어요. 제가 보낸 후원금으로 옷을 사 입고 서 있는 사진을 받아본 적도 있죠. 자금도 잘 지내고 있을지 궁금해요. 후원이 끝난 뒤에는 연락이 이어지지는 않았거든요. 후원이 끝나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어요. 수혜자의 연령도 있고요. 예를 들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성인이 되면서 더 이상 후원을 받을 수 없어요. 우리나라 보육 지원 시스템과도 같죠. 그렇게 해서 후원이 종료되는 경우가 있어요. 만약 아이가 공부를 정말 잘해서 대학을 가게 되고, 계속 후원하고 싶은 경우가 있어요. 그러면 후원자는 한 달에 30만 원씩으로 후원 금액을 올려서 이어가기도 해요. 또 어떤 경우는 아이가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는 일이 있어요. 가난한 지역은 가족관계도 복잡한 경우가 많거든요. 여러 명의 엄마 아래에서 자라거나, 아빠가 누구인지 불분명하거나, 또는 미혼모가 아이를 키우다가 다른 가족과 합쳐지는 경우도 있어요. 집안 사정으로 이사하는 일이 잦아요. 그렇게 되면 아이가 더 이상 기존 센터나 교회 소속으로 다니지 못하게 되니까 후원이 종료되기도 해요. 아주 드물지만 형편이 좋아져서 후원이 필요 없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종료가 되면 후원단체에서 더 이상 후원을 안해도 된다는 연락을 줘요.
아이들은 종종 “후원자님은 언제 저 만나러 오실 거예요?”라고 물어봐요. 저는 직접 만나고 나서 후원을 시작한 케이스였기 때문에 아이도 제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어요. 당시에는 더 어려서 저에 대한 기억이 흐릿할 수 있으니 저랑 만났던 사진을 보내주기도 했어요. 그래서 아이가 저를 계속 기다렸던 것 같아요. 필리핀에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건데, 그게 쉽게 되지는 않더라고요. 시간이 지나 마빈의 사진을 받아보게 되었어요. 좀 더 성장한 마빈은 여전히 웃고 있었어요. 독특한 아이라 단체에서도 조금 알려지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다음에 누군가 그곳을 방문한다고 하면 제가 선물을 보내기도 했어요. 편지와 함께요. 그러면 후원단체에서 아이가 그 선물을 받아서 뜯어보는 모습을 사진 담아 보내줬어요.
마빈 이후에 한 아이를 더 후원했었어요. 탄자니아의 아이였고, 이름은 ‘프라미스’예요. ‘약속’이라는 뜻이죠. 그 아이에게는 편지를 자주 보냈어요. 할아버지와 할머니 손에서 자라던 아이였는데, 어느 시점에 상황이 바뀌었다고 하더라고요. 아이가 다른 곳으로 이사 하게 되면서 후원이 종료되었어요. 총 세 명을 아이를 후원했어요. 한 아이의 후원이 종료되면 또 다른 아이를 후원하고, 또는 두 아이를 동시에 후원하기도 했어요. 프라미스와 마빈은 같이 했었고, 그러다 프라미스가 먼저 종료되고, 그다음에는 마빈이 종료되었어요. 이후에 또 한 아이를 후원 했는데 그 아이도 최근에 종료가 되었어요. 그 과정에서 컴패션보다 다른 곳에 관심이 생기기도 했고, 그래서 마지막 아이의 후원이 끝나면 그만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남편 이름으로 후원했는데, 남편은 편지를 쓰거나 답장을 하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러다 보니 그 부분도 제가 다 맡아야 했었고, 그 지점에서도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성한 편지는 한번 이상의 번역 과정을 거쳐야 해요. 한국어로 쓴다면 영어로 번역되어 미국 본사로 넘어가 내용을 검수 받고, 통과 되면 다시 아이가 있는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어서 전달되어요. 혹시라도 이상한 내용이 전달되면 안 되니까 검수의 과정을 거치는 거죠. 그러다보니 예전에는 답장이 세 달 정도 걸리기도 했어요. 점점 시간이 단축되었지만, 그래도 한 달 반 이상은 걸리더라고요. 대부분 자원봉사자들이 번역을 맡아요. 반대로 아이가 보낸 편지도 똑같은 과정을 거쳐서 도착해요. 편지는 원본과 함께 받을 수 있어요. 그렇기에 영어로 쓸 수 있다면 가장 빠르게 주고받을 수 있어요. 저는 그 사이에라도 또 편지가 쓰고 싶으면 작성해요. 저말고도 열심히 참여 하시는 분들은 그렇다고 해요.
처음에는 손으로 쓴 편지를 주고받는 게 너무 좋았어요. 내가 쓴 글씨가 아이에게 가고, 아이가 직접 쓴 글씨를 내가 받는다는 게 의미 있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게 점점 어려워졌고, 나중에는 웹상으로 편지를 쓰고 받는 방식으로 바뀌었어요. 후원단체 홈페이지에서 입력하면 되는데, 저는 그 방식이 이상하게 의미 없게 느껴졌어요.
중국 지하교회
중국에도 가봤었어요. 그때는 봉사활동이라기보다 교회에서 가는 선교활동이었어요. 단체로 갔는데 총 세 군데를 다녔어요. 천진도 갔고 상해도 갔고, 한 군데는 조금 더 열악한 곳이었죠. 아마 2014년에서 2015년 사이였을 거예요. 우리는 중국어를 못하고, 상대방은 영어를 그렇게 잘하지 않았지만 서로 대화가 되었다는 경험이 참 신기했어요. 손짓과 발짓으로도 소통이 되었죠. 그곳은 소위 말하는 지하교회였어요. 가정이나 작은 공간을 정해 자기들끼리 모이는 형태를 말해요. 중국 대학생들이 그런 모임을 하더라고요. 그들은 조그만 곳에 모여서 예배를 드려요. 우리는 거기에 방문해서 팔찌 같은 것도 만들어주고, 종교 활동에 필요한 것들 전달하고, 복음도 전하고 그랬어요. 거기서 우리들의 손을 사진으로도 남겼어요. 제가 방문했던 당시에는 외국인이면 교회로 들어갈 수 있었어요. 잠깐 개방된 시기였는데, 지금은 외국인들도 추방당할 수 있어서 완전 비밀로만 하는 걸로 알아요. 가정집에 초인종을 눌러야 들어갈 수 있는데, 만약 사람들이 몰려서 한 번에 들어가면 주변 사람들에게 신고당할 수 있으니 방문객처럼 보일 수 있게 띄엄띄엄 나누어 들어갔죠. 또는 캠핑을 온 것처럼 위장하기도 했어요. 대학생 수련원을 빌려서 하기도 했는데 수련회와 같은 형식을 사용하기도 했어요.
또는 대학교를 돌아다니기도 해봤어요. 중국은 대학교 캠퍼스도 너무 넓더라고요. 정문에서 후문까지 여러 번 걸어다녔는데 이러다 죽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당시 중국 날씨가 이상기온을 겪고 있어서 40도가 넘어간다고 했던 때예요. 가기 전엔 너무 걱정했는데 막상 가보니 견딜 만했어요. 한국에 돌아오니 오히려 한국이 더 덥다고 느껴졌어요. 그래도 캠퍼스가 너무 넓다보니 발이 까질 정도로 많이 걸었어요. 함께 만나서 교회로 같이 가야 했는데, 그 교회가 공원 어딘가에 있다고 하니 걸어갈 수밖에 없었거든요. 교회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정말 조그마한 자기들만의 공간이었어요. 가는 길은 즐거웠지만 교회에 도착하면 다리가 너무 아팠어요. 그래도 가장 놀라웠던 건, 언어가 달라 말이 안 통하는데도 손짓과 발짓을 사용하는 것 만으로도 서로 알아듣는 거였어요. 아이들이 ‘알겠다’고 반응해 주는 게 참 신기했죠.
중국에서의 경험을 좀 더 이야기해보자면, 지역을 이동할때마다 기차를 탔었는데, 그렇게 위생이 좋지는 않았어요. 이 말을 남편이 들으면 신기해했어요. 왜냐하면 저는 화장실 위생에 매우 민감해하고, 또 벌레도 정말 싫어하거든요. 그런데 봉사하러 가면 이상하게 괜찮아요. 그곳의 위생이 좋지 않을 수도 있고, 벼룩이 있을 수도 있어도 상관이 없었어요. 남편은 자기랑 있을 때는 벌레만 봐도 기겁하면서 그런 곳에 가면 괜찮은지 늘 물어봐요. 그 마음이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아요. 쉬러 갔을 때는 좋은 걸 누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고, 봉사하러 갔을 때는 그 환경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어요. 어떤 분은 갑자기 사고가 생겨 숙소가 구할 수 없을때 마구간에서 잔 적도 있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타는 기차에는 2층 침대 칸이 있었는데, 실제로 타보니 우리가 생각하는 2층이 아니였어요. 천장에 거의 닿아있는 높이의 2층이었어요. 절대 일어서서 내려올 수 없으니 누운 상태 그대로 내려와야 했어요. 심지어 앉을 수도 없는 정도였죠. 2층에 누워있을 때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제 머리 바로 위에서 나오고 있어 너무 추웠기도 했어요. 하지만 상황이 되면 그냥 받아들이게 되어요. 덥고, 춥고, 불편하고, 지저분해도 다 괜찮았어요.
인도에서
인도에도 가보았어요. 인도는 컴패션에서 많이 활동하고 있었어요. 가보니 그곳의 정서가 우리나라와 비슷한 부분이 많아요. 남한테 보이기 위한 정서 같은 거요. 과시라기보다는, 손님이 오면 조용해야 하고, 깨끗해야 하는 그런 분위기를 말해요. 집 구조는 거의 개방된 형태였어요. 그냥 원룸처럼 방 하나, 부엌 하나 정도인데도 손님이 온다고 하니 급하게 치우는 거예요. 우리는 아이들을 만나러 간 상황이라 그냥 아이들과 잘 지내면 되는 거였는데,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계속 조용히 하라고 했어요. 왠지 그런 모습이 우리 어렸을 때의 분위기와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인도는 다신교 문화예요. 본인이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는 인도인도 막상 집에 가보면 다른 신들도 함께 모시고 있는 걸 보아요. 믿는 신이 여러 명일 수 있어요. 그러다보니 길에서 전도를 하면 ‘믿겠다’고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아는 단일한 신앙의 의미와는 다를 수 있어요. 인도에 선교를 갔던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 부분은 많이 이야기되던 거예요.
인도에는 한 일주일 정도 머물렀어요. 사실 저희 같은 일반인이 참여하는 봉사나 선교는 그들에게 무엇을 해주기 위한 활동이라기보다는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마음으로 느끼는 데 의미를 두어요. 그게 컴패션 단체의 가치관이기도 했고, 제가 좋게 보았던 부분이기도 해요. 직접 방문해서 현장을 보는 경험, 이런 환경과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경험으로 마음의 연결이 자연스럽게 생기고, 이를 통한 자발적인 후원이나 참여가 이어질 수 있는 거예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냥 그대로 돌아와도 되는 거예요. 그렇기에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었고, 너무 마음이 들어 계속하다 보니 ‘나는 이쪽이 비전인가?’ 하는 생각을 가질 때도 있었어요.
봉사하는 삶
저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에요. 어려웠던 시간을 보내면서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오는 걸까’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러한 시간 속에서 누군가를 만나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있어주다 보면, 내가 그 사람에게 위로가 되어 줄 수 있고, 반대로 제 안에 숨겨왔던 아픔을 드러낼 때도 있어요. 이러한 과정에서 마음의 치유가 일어나는 것을 경험했어요.
필리핀의 무덤 마을에서 만났던 마빈이 제 곯아 있었던 상처에 알코올을 확 바르고 드러낸 것 같다고 이야기했잖아요. 중국도, 인도도 그렇고, 그런 만남들이 제게는 치유의 과정이 되었어요. 그렇다고 제 모든 상처가 다 나았다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러한 치유의 과정을겪으면서 제 상처를 다시 바라보고 그 속에서 다른 기쁨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어요. 상처가 아물고 나면 새로운 살이 돋듯이 계속 아프기만 한 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거죠.
제 이야기를 통해 다른 사람이 회복되는 걸 보기도 했어요. 제가 어떤 사람에게는 치유의 역할을 해줄 수도 있는 거죠. 최근에는 저희 집에서 잠시 모임을 가진 적이 있어요.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상황을 들어주는 모임이었는데, 그 시간이 참 벅차더라고요. ‘이 모임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도 들었고, 그 모임이 하나의 열매가 되기를 바랐어요. 또 꼭 우리 집이 아니어도, 이런 작은 씨앗들이 여러 곳에서 생겨나서 풍성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말씀드렸다시피, 요즘은 가정이 너무 쉽게 무너지는 경우가 많잖아요. 누구 한 사람의 잘못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어요. 여러 상황이 겹치면서 결국 이혼을 결심하기도 하고, 그러한 과정에서 많은 갈등과 상처가 생기기도 하죠. 다행히도 가족 사이에 회복이 될 수 있는 경우도 분명히 보았어요. 단지 그 과정에서 서로가 노력하는 법을 모르거나, 방법을 몰라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된 모임이었어요. 전문가의 시선에서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입장이라기보다는,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필요한 도움을 주고받고는 과정에서 생가는 생기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보았죠. 이렇게도 회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나의 아픔을 이야기하는데도 오히려 행복해지는 느낌도 들었어요. 저와 비슷한 과정을 겪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정말 많았어요.
아홉 번째 장: 제주도와 귤 농장
남편을 만나기 전, 한달 반 정도 제주도에서도 시간을 보낸 적이 있어요. 휴직 기간에 다녀왔어요. 회사 생활을 하다가 힘들어서 잠깐 휴직을 했었거든요. 마음이 많이 지쳐 있던 때라서, 봉사를 하러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갔어요. 봉사하러 간 거라 짐을 메고 제주도 버스를 타며 이동했어요. 버스가 자주 오지 않으니 이동도 쉽지 않았어요. 그곳에서 혼자 달도 보고, 걷고, 또 귤도 땄어요. 제주도에 머무는 동안은 귤 농장에서 지냈어요. 나의 노동력을 제공하면 숙식을 제공받을 수 있는 봉사 프로그램이었어요. 귤을 따다 보면 손이 많이 상해요. 피고름이 날 정도로 손이 심하게 상할 때도 있었어요. 제주도에서 지내면서 귤따기를 하고, 쉬는 날에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어요. 혼자서 제주도를 다닐때는 길 사진을 많이 찍었어요.
귤밭에는 모기가 정말 많이 있었어요. 그 농장은 농약을 쓰지 않겠다는 친환경적인 철학을 가지고 있어서 모기가 특히 많았어요. 여름에는 청귤을 수확해요. 정말 더울 때였지만 모기에 물리지 않기 위해 얼굴과 몸을 최대한 가리고 나갔어요.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기는 다 뚫고 들어왔어요. 하루에 백 번씩 물릴 정도였어요. 귤 따는 일은 예상보다 훨씬 힘들었어요. 고행이 시작되었죠. 아침 일찍 일어나야 했는데, 주인이 새벽 5시쯤에 문을 두드리며 ‘일어나세요’ 또 귤을 따러 가야 한다는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였으니까요. 제가 스스로 선택한 일이긴 한데, 좋다는 것이 이렇게 힘들어 되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나중에는 상상초월할 정도의 모습이 되었어요. 처음에는 평범한 모습으로 갔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새까맣게 타면서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었죠.
그 농장에는 해외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어요. 일종의 워킹홀리데이처럼 경험을 위해 온 사람들이었어요. 그들과 잠시 함께 생활하기도 했고, 일하기도 했어요. 제가 만난 사람들 중에는 인도네시아에서 온 남매도 있었는데 그런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이었어요. 한국에서의 경험을 해보고 싶어서 왔다고 말했어요.
기억을 되짚어보니, 집을 개조하는 봉사활동에도 참여해 본 적이 있어요. 해비타트와 같이 집을 고쳐주는 활동이었는데 여럿이 함께 참여하는 과정에서 집이 변화하는 과정을 직접 보아요. 저는 혼자서는 뭘 잘 못하지만, 어떤 단체에서 ‘이번에 이걸 하자’고 역할을 주면 바로 동기부여가 되어 움직여요. 스스로는 잘 못 움직이는데, 누군가가 나에게 무언가를 부여해주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인 거죠.
제주도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마음이 많이 힘들 때였고, 봉사활동을 하면서 나 자신을 다시 세워보자 하는 마음으로 농장으로 갔어요. 농장에서의 풍경들을 보면서 마음을 진정시키곤 했어요. 바로 근처에는 목장이 있었고, 그곳에는 자전거가 있어서 혼자 자전거를 타고 제주도를 돌아다녔어요. 내가 힘들었다는 걸 스스로 기록하고도 싶어서 신발을 벗어 자전거와 목장 풍경을 함께 두고 사진을 찍었어요. 지나간 인생을 생각하면서 남겨둔 기록이었어요.
봉사활동을 가면 나를 일부러 조금 힘들게 하는 면이 있어요. 그렇게 보내다 보면 복잡한 생각이 잊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요. 농장에서는 빨래도 직접 손으로 했어요. 귤 따는 봉사는 사실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지만 내가 자처해서 간 거라 책임감을 가지고 계속 했어요. 하루 종일 일하고 나면 정말 일꾼처럼 배가 고파져서, 거기서 주는 밥을 엄청 많이 먹곤 했어요. 그렇게 밥을 먹고 쉬면서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덕분에 제주도에 대한 기억이 많이 남아 있어요. 한라산도 혼자 올라가 봤어요. 아무 준비 없이 올라갔는데 생각보다 힘들고, 배도 고팠고, 꼭대기로 올라갈수록 춥기도 했어요. 하루 쉬는 날이 생겨서 갔는데 너무 고되었어요. 그래도 일을 계속하다 보면 휴일에도 집 안에 머무르는 것보다는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졌어요. 제주도에 있는 동안은 길을 보며 걷고 계속 길 사진만 찍어댔어요. 길을 보면서 생각하는 시간을 꽤 많이 가졌어요. 그때 길에 집착하듯 찍은 사진들이 많아요. 쉬는 때면 계속 나가려고 했어요. 가만히 있으면 더 힘들었기도 했고, 내 자존감이 낮아져있던 시기라 더 노력했었어요. 내가 가진 시간과 에너지를 잘 사용하고 싶었어요.
봉사를 왜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사람마다 좋아하는 것이 다르다고 얘기하고 싶어요. 누군가는 맛있는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 수도, 또 누군가는 명품을 사면 자존감이 올라갈 수도 있어요. 저는 봉사활동을 하면서 제 가치를 확인하고 즐거움을 느껴요. 그렇지만 동시에 때때로 내가 이걸 진짜 좋아하는 건지, 또는 어떠한 이유로 하는 건지에 대한 고민도 진지하게 하게 되어요.
열 번째 장: 키워드들
#사진
사진은 정말 소중한데, 그렇다고 자주 찾아보지는 않게 되어요. 예전에는 연도별로 폴더를 나누어 거기에 맞게 정리해 두고 저장하는 작업을 꽤 꾸준히 했었어요. 한동안은 그렇게 했는데, 그 기록들을 담은 저장소가 고장 나면서 한 번에 날아가고 나서부터는 대충 모아두기만 하고 다시 들여다보지를 않아요. 이번 만남을 위해 오랜만에 예전 사진을 찾아보았는데, 그게 또 새로웠어요. 사진에는 젊은 시절의 제가 그대로 남아 있는 거잖아요. 늘 거울 앞에 서의 나를 보면 ‘나이 들어보인다’라고만 생각했는데, 10년 전 사진을 보니까 그때의 나는 분명히 젊었더라고요. 그런 걸 또 느꼈어요.
#손
사진을 둘러 보니 제가 손을 찍는 걸 좋아한다는 걸 다시 발견해요. 손을 잡고 있거나, 손이 포개져 있는 사진을 자주 보게 되어요. 제가 길 사진에 집착하는 것처럼, 손 사진에도 집착을 가지고 있어요. 손을 찍으면 함께 있다는 느낌을 전달하게 해요. 선교 또는 봉사활동을 할 때 손 사진을 찍은 것도 여러 장 있어요.
남편과 결혼할 때 찍은 손 사진이 있어요. 결혼식 때 들었던 꽃도 기억나요. 그 꽃을 구하는 게 정말 힘들었어요. 제가 결혼식을 겨울이 거의 끝날 즈음에 했는데, 제가 부케로 원했던 꽃이 있었고, 그 꽃은 겨울에 구하기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붉은색의 카라 꽃이 였는데, 구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어요. 헤어 메이크업이나 다른 건 크게 상관없어도 그 꽃만은 꼭 하고 싶다고 했어요. 왜 그렇게까지 들고 싶었는지는 말로 설명하기에는 어렵지만, 그때만큼은 꼭 그 꽃이어야 한다고 했어요. 결국 담당자분께서 어렵게 구해주셨어요. 완전히 제가 상상한 그대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결국 결혼식에서 들 수 있었죠. 그 부케와 함께 반지를 낀 두 사람의 손이 포개져 있는 사진이 있어요. 우리 부부가 결혼할때의 사진을 다시 찍어보고 싶어서 비슷하게 사진을 찍어본 적이 있어요. 제주도에서요. 그때는 그런 콘셉트 같은 걸 좋아했어요. 예전 웨딩 포토와 비슷하게 남편이랑 반지를 끼고 손을 찍는 거죠.
#길
길 사진을 많이 찍었더라고요. 제 마음속에는 늘 어떤 이미지가 있어요. 페이스북을 하던 시절에 한 장의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사진이 제 마음과 같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 사진을 다시 찾으려고 하는 과정에서 제가 길 사진을 계속 찍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선교나 봉사를 가서도 계속 길 사진을 찍었고, 여행을 가도 또 길을 찍었어요. 손 사진을 찍는 것처럼, 길 사진에도 계속 눈길이 가요.
#문, 벽
파란 대문과 같이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색감이나 형태의 문도 눈에 들어와 찍기도 했어요. 특히, 제주도를 갔을 때 벽 같은 것들을 많이 봤어요. 색이나 질감이 특이한 벽을 보면 계속 눈이 가더라고요. 그런 벽 앞에서 사진을 찍고, 또 그 벽을 오래 바라보고 있었어요.
공간 안에서 제 뒤가 보이게 찍은 사진들도 있어요. 이러한 구도를 좋아하기도 해요. 벽이나 대문, 손, 길... 이런 요소들을 좋아하고 주목해요. 저는 그 안에서의 색감이나 표면, 형태 같은 걸 계속 보게 되어요.
#색
원래는 초록색과 보라색을 좋아했어요. 요즘에는 초록색을 더 좋아하게 되었어요. 초록색보다는 녹색이 더 맞는 표현 같아요. 보라색은 밝은 보라를 좋아해요. 보라색을 좋아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사이코(psycho)’를 떠올리는 데, 마침 남편도 연애할 때 좋아하는 색을 물어보니 보라색이라는 거예요. 둘 다 보라색을 좋아하닌 둘 다 ‘사이코’가 되었죠.
#일기
글은 잘 쓰지는 않아요. 하지만 일기는 계속 써오고 있어요. 옛날에는 정말 꾸준히 일기를 썼어요. 어렸을 때는 학교에서 일기를 쓰라고 하기도 하고, 일기 쓰는 게 자연스러웠어요. 저는 일기를 쓰며 하루를 기록하는 게 너무 좋았어요. 일기장을 사서 쓰다가 회사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는 회사에서 주는 다이어리에 쓰기 시작했어요.
손으로 일기를 쓰다가 어느 순간부터 회사 노트북으로 옮겨 작성하기 시작했죠. 그러다 큰 일이 있었어요. 아마 2010년 즈음에 그 일이 있었던 것 같아요. 회사 노트북에 담겨 있던 일기 몇 년 치가 저장소가 고장 나면서 한꺼번에 사라져버린 거예요. 2012년부터 6년간 적어왔던 기록이 모두 사라졌어요. 파일명이랑 폴더 구조만 남아 있었고, 내용은 하나도 복구가 되지 않았어요. 노트북이 한번 잘못되면 그런 일이 일어나잖아요. 복구 업체를 찾아다니면 어떻게든 되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회사 노트북이었고 보안 문제도 있었고, 또 제가 그때는 그런 부분에 무지하기도 해서 시도해보지 못했어요. 결국 복구를 할 수 없게 되자 제 인생을 통째로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그 기분은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그 과정에서 내가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렇게 사라지는구나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때 너무 슬펐어요. 막 울었다기보다는, 한동안 멍한 사람처럼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지?’, ‘내가 그렇게 소중하게 매일 기록해왔던 것을 어떻게 이렇게 잃을 수가 있지?’라는 생각만 계속했어요. 내가 오랫동안 쓴 기록들이 없어졌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어요.
그래도 다시 일기를 쓰고 있어요. 그 일을 겪은 이후로는 매일 같이 쓰지는 않고, 그때그때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이어서 쓰고 있어요. 손으로 쓰기도 하고, 노트북에 쓰기도 하고, 왔다 갔다 하면서요. 점차 다시 노트북으로 돌아오게 되더라고요. 손으로 쓰는 게 잘 안 되어요. 보통 하루가 끝나갈 때 일기를 써요. 요즘은 매일 쓰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에 한 번 정도가 되는 것 같아요. 어느 날 문득 작성한 날짜를 보니 비슷한 요일에 계속 쓰고 있더라고요. 무슨 의미일까 생각도 해봤어요. 아마 일주일에 한 번씩 마음이 정리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요.
일기를 쓰는 건 내 일상을 기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내 생각을 정리해 놓고 싶어서예요. 한동안은 ‘나중에 이걸 책으로 만들어야지’ 하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어요.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풀리는 것도 있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생각들 있잖아요. 그런 것들을 혼자 적어두고 싶었던 거죠. 생각을 정리해 놓고 싶었어요. 그래서 나에게 글을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책을 특별히 많이 읽는 편은 아니에요. 아주 어렸을 때는 책을 좋아했던 것 같은데, 어느 시점부터 게으름이 생기면서 멀리한 것 같아요. 게으름이 생각을 따라가지 못하는 때가 있었고, 나중에는 생각 자체도 게을러지는 때가 있었어요. 그러다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들을 다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죠. 그때 마음만 먹었더라면 관련한 학교라도 다시 다녔을지 모르지만, 그냥 ‘언젠가’ 하고 흘러보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후회하기도 해요. 내 인생에서 진짜 하고 싶은 것들을 그때는 왜 안 했을까 하는 후회가 있어요. 요즘 사람들에게 나는 절대 공부를 다시 하고 싶지 않다는 얘기를 자주 해요. 나이 들어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단해 보이지만 이해는 잘 못하겠는 거예요. 공부를 하면 너무 재미있다고들 해요. 그런 말을 들으면 과연 나는 공부를 할 때 재미있었던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해요. 뭔가를 공부 한다는 것 자체에 대한 부담도 있어요. 이런 생각을 하는 나를 보면서 이제는 내가 ‘몸이 게으른 것이 아니라 생각도 게으르구나’ 라는 걸 느껴요.
그럼에도 학창 시절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는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어요. 일기를 쓰는 건 오래 걸리지 않거든요. 그냥 내 일이니까요. 말로는 내뱉을 수 없는 말들, 예를 들면 누구를 욕하고 싶다거나, 답답한 마음 같은 거를 글로 적어놓는 거죠. 그러면 잊어버리지도 않고 또는 적어가는 과정에서 풀릴 때도 있고요. ‘고백한다’라고 표현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수 있지만 너무 화가 날 때는 말로는 못 하니까 글로 고백했던 적도 많아요. 그냥 시원하게 쓰고 나면 화가 조금 가라앉는 그런 느낌이 들어요. 하지만 진짜 내 마음 안에 있는 생각을 모두 바깥으로 꺼낸다고 꺼낼 수는 없어요. 그러다보니 간혹 일기를 쓰다가도 이런 의문이 들 때가 있어요. “내가 지금 적는 것이 진짜 내 마음 깊은 곳의 진심일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가장 사적인 일기장이라도 바닥까지 다 드러내는 건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글로 쓸 때도, 이 문구가 내가 조금 꾸며서 쓰는 건 아닐지, 진짜 생각을 다 꺼내지 않는 건 아닐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가 많아요.
예전 일기는 잘 들여다보지 않았어요. 이번 기회로 일기를 확인해보니 2008년과 2009년에 작성했던 것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어요. 정확한 연도는 잘 모르겠지만, 2000년대 초반에서 2007년 또는 그 전후 몇 년의 기록이 통째로 사라졌어요. 대략 6~7년 정도의 기록이 사라진 거죠. 그 이후의 기록은 남아 있어요. 2008년부터는 2009년, 2010년 이런 식으로 저장되어 있어요. 사라진 일기들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을지, 어떠한 스타일로 작성했을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시기에는 지금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글을 썼다는 건 확실해요. 어떤 책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자연스럽게 그리 된 것일 수도 있는데, 그때는 감정과 이야기가 일기 안에 좀 더 들어있었어요. 일기를 읽으면 그날의 감정이나 상황이 보였고, 하나의 글처럼 이어지는 느낌이었어요. 지금은 거의 감정만 써요. 그날 일어난 일을 길게 풀어 쓰는 게 아니라, 나열하듯이 있었던 일의 목록과 그에 대한 내 감정만 간단하게 적는 식이에요. 예전처럼 매일매일 쓰는 것도 아니고, 생각날 때 한 번씩 쓰는 편이에요. 그러다 보니 요즘의 일기는 예전처럼 ‘나만의 시간’ 같은 느낌이 아니라, 내 마음을 한 번 정리해두는 기록에 가까워요.
일기를 돌아보면 그 시기에 전체적으로 내가 어떤 관점에서 무엇에 신경을 쓰고 있었는지 정도는 보여요. 예를 들면, 한 달 치를 읽어보면 그때 내가 어떤 문제에 마음을 많이 쓰고 있었는지를 발견할 수 있어요. 하지만 예전의 일기처럼 그날의 감정이 구체적으로 느껴지거나, 그 당시의 상황이 생생하게 떠오르지는 않아요. 예전의 일기는 감정이 줄줄 흐르는 글이었다면, 지금의 일기는 감정을 표시해두는 메모에 가까운 것 같아요.
#저장소
요즘에는 핸드폰 저장공간이 커져서 대부분의 사진을 핸드폰에 저장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그때는 USB에 저장해두었어요. 사진을 인쇄해서 앨범에 보관하기보다는 컴퓨터에 보관했어요. 처음에는 USB 용량이 작아 불편했는데 나중에는 테라바이트(TB) 용량의 외장하드가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그걸 사서 거기에도 저장했어요. 그런데 그 외장하드를 한 번 떨어뜨렸더니 자료가 안 열리는 거예요. 너무 당황스러웠죠. 복구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를 찾아갔는데, 그걸 복구하고 싶으면 외장하드를 산 비용만큼의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거예요. 내 자료이자 일상의 기록이다 보니, 결국은 비용을 주고 복구를 했어요. 이후에 외장하드를 새롭게 구매했는데 그걸 또 살짝 떨어뜨렸는데도 똑같은 일이 생긴 거예요. 주변에서는 항상 백업용으로 저장소를 두 개로 해놓으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해요. 매번 저장하고 옮기고 관리해야 하는데 일반인에게는 쉽지 않죠. 결국에는 ‘저장을 한다’는 게 너무 피곤해졌어요. 그 일이 있고나서는 점차 클라우드로 옮기기 시작했어요. 네이버 클라우드를 사용했는데, 제가 통신회사에 있었다보니 이런 부분에 있어 자연스럽게 활용해 볼 수 있었어요.
두 번이나 같은 경험을 하다보니 저한테는 큰 트라우마가 되었어요. 그래서 요즘에는 정말 꼭 필요한 것만 저장하고, 나머지는 그냥 대충 대충 넘기게 되어요. 예전처럼 모든 걸 소중하게 정리하고 보관하려고 하지 않아요.
# 미래 일기
컴퓨터에서 사진을 찾다가 사진이 아닌 문서 하나를 보았어요. 이게 뭘까 싶어 열어보니 제가 2011년에 썼던 ‘미래 일기’였더라고요. 저만의 미래에 대한 예측 같은 것을 적어놓은 문서였는데, 목록처럼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시간을 작성해두고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하는 내용들을 써두었어요. 일종의 인생 예측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읽어 보면 가운데 줄이 그어진 문장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실제로 이루어졌거나 또는 그 시간이 도래해서 지나가 버린 것들이에요. 색도 다르게 해서 작성했는데, 검정색으로 작성한 글들은 미래를 상상하거나 예측했던 내용이고, 아래에는 그 일이 실제로 있었는지, 어떻게 되었는지를 적어두었어요. 결과적으로 잘 된 것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도 있고, 그냥 그대로 지나간 것도 있어요. 그러다 더 이상 열어보지 않게 되었어요.
열한 번째 장: 교회
보통은 자신에게 고난이 닥치거나 가족이 아프거나 했을 때 교회나 절을 찾아가게 되잖아요. 하지만 저는 그런 특별한 계기로 인해 종교활동을 시작한 거는 아니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의지가 약한 아이였고, 종교를 접하기도 쉬웠어요. 예를 들면 크리스마스가 되면 주변 사람들을 따라 교회를 놀러가보기도 했어요. 늘 그렇게 가까이서 접해왔기 때문에 '교회를 가면 좋다'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어요. 하지만 혼자서는 못 가는 아이였죠. 언니가 교회를 가면 따라서 갈 정도였어요. 혼자서는 두려움이 많았었거든요.
고등학교 때도 교회를 다니는 친구가 있었어요. 저는 그 친구가 저를 같이 데려가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한 번도 저에게 전도를 안 하더라고요. 이 시기에 몇 번 교회를 따라가긴 했지만, 항상 흐지부지되고 말았어요. 늘 교회를 접하긴 했어도, 꾸준히 다닌 것은 아니었어요. 사회생활을 할 무렵이 되었을 때, 언니들이나 친구들에게서 제가 혼자 뚝 떨어지게 되었어요. 그 시점에 다시 교회를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마침 초등학교 친구를 우연하게 만났고, 그 친구가 교회를 다닌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래서 친구에게 ‘나 좀 교회에 데려가 줘’라고 부탁했어요. 그리고 같이 다니기 시작했죠. 결국 본격적으로 교회를 다닌 시점은 사회생활하면서였어요.
저에게는 가족 구성원 중에서도 큰언니가 제 삶에 영향을 많이 미치는 사람이었어요. 큰언니가 저를 무척 예뻐했거든요. 막내여서 더 예뻐해 주었고, 저한테는 제2의 엄마 같기도 했어요. 언니가 저를 너무 예뻐해서 심지어 연애할 때도 저를 데리고 다닐 정도였죠. 그러다 보니 언니가 뭘 하자고 하면 한 번도 싫지가 않은 거예요. 언니가 뭘 하자고 하면 저는 늘 "그래"라고 했어요. 그러다보니 제 별명도 "그래"가 되었죠. 동생들이 대체로 좀 그렇거든요. 큰 언니가 이야기하면 둘째, 셋째 언니도 "그래"라는 대답을 곧잘 했어요.
어느 날 언니가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동생들에게 축하해주러 오라고 해서 저는 또 "그래" 라고 했죠. 그러면서 ‘언니는 성당을 다니는구나' 하고 생각했죠. 그러다 언니가 결혼해서 서울로 왔는데, 언니에게 들어보니 이번엔 성당이 아닌 교회를 다닌다고 하더군요. 형부가 교회를 다녀서 바꾸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언니가 저에게 같이 가겠냐고 물었고, 저는 "그래"라고 대답하며 또 따라갔어요.
언니가 조그마한 개척교회를 다니고 있었어요. 저는 그 분위기가 너무 좋았어요. 그 교회에는 저랑 비슷하거나 위아래인 청년들이 몇 명 있었는데, 사람들이 하나같이 좋고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이제 좀 믿음을 가져볼까' 하려던 찰나, KT에 취업이 되어서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었어요. 몇 년간은 교회를 다니다 말다 하다가, 어느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마침 사회생활을 하면서 친구를 만나 다시 다니게 된 거예요. 또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요. 그 당시에는 지방에서의 직장생활도 재미있었고, 주말마다 집으로 올라갔는데 교회를 가면 또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교회 사람들과 하는 여러 활동이 너무 재미있었고 하다 보니 생각보다 더 열심히 다니게 되었어요. 다 같은 청년이었고, 청년부를 맡았던 목사님도 너무 유쾌하셨어요. 그러한 계기에서 본격적으로 교회를 다니게 된 거죠.
그래서 사람들이 저에게 종교 생활의 계기를 묻는다면, 저는 특별히 힘들었던 계기는 없다고 말해요. 제 삶이 슬프기는 하였지만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간 거는 아니었어요. 저의 종교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어요. 제 삶의 대부분은 주로 종교 활동을 통해 많이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인연들이나 제 인생의 어떤 중요한 일들, 또는 선교 같은 일도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교회를 다니면서 사람들을 많이 만나 왔고, 인간관계도 주로 그곳에서 가지고 있어요. 물론 아닌 경우도 있지만, 가족 일이나. 대부분 인간관계는 거의 종교 활동을 통해 만들었어요.
어렸을 때는 교회가 근처에 많고 대부분이 경험하다 보니 분위기를 느꼈고, 학창시절에는 친구를 따라다니기도 했고, 20대에는 언니가 가자고 하니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따라다녔어요. 사회생활 하면서는 사는 지역 때문에 교회를 옮기기도 했지요. 그러한 과정에서 조금씩 깊은 신앙심이 생겼어요. 특히, 처음 지방으로 발령이 나서 내려가 있을 때, 가족 중에 아픈 일이 생겼어요. 그때는 심적으로 너무 힘들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우는 거 말고 없었거든요. 눈물이 워낙 많았어서 그 시절에는 계속 울기만 했어요. 할 수 있는게 하나도 없다 보니 무기력해지고, 눈물만 나는 거죠. 그때 교회에 목사님들이 많이 계셨어요. 어떤 한 목사님 부부께서 그런 저를 보시더니 제 원가족처럼 늘 옆에 있어주셨어요. 그때는 그 감사함을 몰랐어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을 할 정도로 저만 생각했었어요. 힘들 때 마다 그분을 찾아갔어요. 댁에도 찾아갔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왜 그랬나 싶어요. 당시 그 집에는 저보다 더 어린 아이들이 세 명이나 있었거든요. 그런데도 제가 전혀 개의치 않고 그냥 내가 슬프다는 이유만으로 찾아뵈었어요. 너무 슬프면 댁으로 방문했고, 사모님을 앞에서 엉엉 울고 했던 시간을 보냈어요. 그때의 저는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지만 이제 생각해보면 '내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거야, 민폐 아니였을까?' 해요. 그 힘들었던 시기에 기꺼이 옆에 있어주신 목사님 부부께 너무 감사해하고 있어요. 지방에 계시다 보니 이제는 자주 못 뵈어요. 얼마 전 근처에 갈 일이 있어 남편의 권유로 함께 인사를 드리러 갔어요. 이제는 많이 노쇠해지셨더군요. 그곳에서 추억을 나누며 좋은 대화를 가지게 되어 기뻤어요.
열두 번째 장: 인생일지
최근에 교회에서 하는 프로그램 중에 '인생일지'라는 게 있어요. 인생일지는 내가 살아온 이야기나 어떤 인생의 전환점들을 위주로 진행해요. 우리 세대나 5070 세대들은 아마 비슷한 시절을 살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인생일지는 본인의 인생을 쭉 돌아보면서, 굳이 기억하지 않았던 것들을 중심으로 작성하게 해요. 그러한 이유에서 사람들이 인생일지를 쓰는 거를 많이 힘들어 해요, 저는 항상 일기를 작성해왔던 경험이 있어서 인생일지를 쓰는 게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어요. 그럼에도 어떤 특정한 사건을 작성해야 할 때는 부담이 되었죠. 몇몇 기억을 써야할 때는 힘들었지만, 전반적으로는 어렵지는 않았어요. 일지를 쭉 작성하면서, '나의 인생에도 어떤 전환점이 있었구나'와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되어요. 예를 들면, 가족의 사망으로 잃었을 때의 슬픔, 그리고 가난과 관련한 사건들도 있어요. 이러한 것들이 저를 지금까지 끌고 오는거죠. 슬픔 또는 아픔이 담긴 가족사들이 계속 제 인생의 동반자처럼 가슴 속에 자리잡으며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죠.
참가자들이 저와 비슷한 세대이다 보니 대부분이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어려운 시절을 살았고, 부모와 엮이고 갈등하는 가정에서 자랐다는 등의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어요. 물론 부유한 집도 있었지만, 대체적인 분위기는 ‘그 시절은 다 가난했다’ 였어요. 그 중에서 얼마나 더 가난했냐 정도의 차이인거죠. 이 프로그램을 통해 '나만 가난하지 않았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인생일지를 통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역시나 비슷한 세대들은 나와 비슷한 시절을 살았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어린 시절에 어떻게 성장을 했고, 또 부모 중에 누가 돌아가시면서 집이 더 어려워졌다, 하지만 불굴의 의지로 이겨내었다 등 삶의 흐름이 비슷하더군요. 제가 작성했던 인생일지를 되돌아보니 나 스스로가 어른 아이였다는 걸 느꼈어요.. '나는 그렇게 살면 안 되겠다', '나는 착하게 살아야 되겠다', '우리 집은 돈을 좀 많이 쓰면 안 되겠다'라고 생각하는 삶을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품고 살았기 때문이에요. 다행히 지금은 긍정적으로 바뀌긴 했어요. 말씀드렸다시피, MBTI에서 저는 극 I인 내향형이에요. 보통은 사람들을 사귀기 어려워 할 정도의 낯가림이 있는 극 I이지만, 깊은 관계를 지향하는 스타일이에요. 사람들을 다양하게 사귄다거나 다수의 사람들이 함께하는 곳에서는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지는 사람이에요. 그래도 지금은 점차 나아지고 있어요.
그래서 최근의 인생일지 이야기를 자꾸 언급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게, 그때가 제 인생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허심탄회하게 얘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제서야 제 슬픔을 열어볼 수 있었어요. 게다가 저의 발표는 다음 참가자들 좀 더 쉽게 내면을 열어줄 수 있는 어떤 통로가 되어 주었어요. 저의 이야기가 그분들에게도 치유가 되는 것을 많이 경험했어요. 덕분에 지금은 내 이야기를 그렇게까지 감춰야 하나 싶기도 해요. 그렇다고 또 여기저기 스피커처럼 얘기하고 다닐 수는 없고요.
인생일지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어요. 남편이 자신의 인생일지를 발표할 때, 우리 아내는 자립준비청년을 지원하고 있다 라는 얘기를 했고, 나중에 돈이 생기면 금전적으로도 더욱 후원하고 싶다라는 말을 했었어요. 별다른 의미는 없었어요. 그런데 마침 그 안에 시설을 나와 자립준비청년 제도를 경험했던 분이 자리에 있었던 거예요, 참여할때는 결혼을 해서 부부로써 있었어요. 이 프로그램을 오래 같이 하다보니까 자신의 과거를 노출해야 했는데, 점점 부담을 가져오던 중남편의 말을 들은거죠. 그 사람은 저보다 훨씬 어렸고, 우리 부부가 자신들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지, 어떠한 봉사를 하는지 궁금해했을 거예요.
이후 제 인생 일지를 읽었는데 제가 어렸을 때 얼마나 어렵게 살았는지, 삶이 고달팠는지, 그리고 힘들게 해내었던 결혼 생활도 쉽지 않았다 라는 얘기를 하고 마쳤어요. 사람들을 보니 매우 슬픈 얼굴로 울어줬어요. 교회 사람들이 유난히 감성적인 사람들이 많다보니 눈물을 잘 흘리기도 해요. 저 또한 울면서 얘기를 했기에 사람들도 함께 울게 되었는데, 갑자기 그 자립 청년분도 펑펑 우는 거예요. 남자분이였는데 말이죠. 그때는 그분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기에 우리 사이에 공감대가 하나도 없을 것 같아 의아하게 생각했죠. 그러고나서 한명씩 각자 돌아가면서 피드백을 주는 시간이 왔는데 그분이 마이크를 잡고 펑펑 울면서 얘기를 시작했어요. 사람들은 그 분을 보면서 무슨 일이 있는 건지 궁금해했어요. 저희 남편과 제가 자립준비청년을 얘기했을 때 아마 대다수는 잘 몰랐을거거든요. 근데 그분이 마이크를 들면서 하는 말이 “제가 자립준비청년 출신입니다”라고 하는거예요. 그말과 함께 나를 바라보는데, 그 눈빛에 제 가슴이 무너져버렸어요. 그 사람이 제 이야기를 듣고 나니 여기서는 자기의 얘기를 해도 안전하다고 생각했대요.
우리가 어떤 어려운 사연이 있는 경우, 어디서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두려운 일이에요. 예를 들면 우리 사회의 인식이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내가 또는 지인이나 부모가 ‘이혼을 했어’라고 말하기는 정말 힘들거든요. 그런데 그 분이 그 자리에서 자신의 과거를 얘기해도 여기 사람들은 다 이해해주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제가 자립준비청년 출신입니다"라고 얘기를 한 거죠. 그러고 나중에 자신의 인생일지를 통해 그동안의 이야기를 쭉 말하더라고요. 그게 저에겐 큰 감동이었어요. 그때의 인생일지 시간은 저의 인생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어요.
열세 번째 장: 퇴직 이후
저는 원래 혼자서도 식사를 아주 잘 챙겨요. 밖에 나가서 혼자 밥을 먹는 것도 어렵지 않아 해요. 사람을 사귀는 건 어려워해도 혼자 밖에 나가서 밥을 먹고 하는 거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퇴직 후 전업주부가 되었어도 나를 위해 먹는 거라면 집이던 바깥이던 전혀 귀찮지 않아요. 진짜예요. 이런 말이 있어요. 얼마 전에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아무리 게으른 사람이어도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새벽에라도 나가서 술을 마실 거라며, 그건 절대 게으른 게 아니’라는 말이 있어요. 저 같은 경우에도 다른 건 게으를지 몰라도 먹는 게 떠오르면 나면 당장 몸을 움직이기 시작해요. 그정도로 먹는 걸 너무 좋아하죠. 하지만 최근에 와서는 좀 자제를 해야 한다는 걸 느껴요. 본인 몸은 본인이 잘 안다고, 요즘에 먹는 것 때문에 몸이 불편해지다보니 저에게 스트레스를 주더라고요. 중년이 되면 살이 찌면 누워 있어도 불편해, 앉아 있어도 불편해, 어떤 자세를 해도 불편하다는 걸 느껴요. 제가 예전에 대장이 안 좋아서 잠시 투병을 했었거든요. 그래서 식사량을 조절해야 해요. 너무 많이 먹어도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안 먹어도 안 되어요. 의사가 적정량을 섭취하라고 하는데 잘 모르겠는 거예요. 그러다보니 제 자신이 먹는 거에 있어 가끔은 심각해지기도 해요. 건강한 식사가 필요한데도 자꾸만 불량 식품에 눈길이 가거든요. 달달한 과자와 케이크를 무척 좋아해요. 디저트를 먹다 밥을 또 먹을 때도 있었고요.
무기력
올 여름은 유난히 무기력하게 보냈어요. 종일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원래 더위를 잘 안 타는 사람인데, 올해 여름에는 더위를 견디기가 힘들정도로 덥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그러다보니 사람이 매우 무기력해졌어요. 갱년기와 더위를 같이 겪으니 너무 무기력해져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졌어요. 퇴직을 하고난 뒤라 아무것도 안 하는데 올 여름에는 더더욱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뭔가 해볼 수 있는 것을 찾아보려고 했고, 집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으려고도 노력했어요.
사람들이 보통 퇴사를 하면 어느 순간부터 우울해진다고 하더군요. 회사를 그만두면 당장은 해방감에 너무 좋지만, 3개월 정도 놀다 보면 더 이상 놀 일도 없다는 거죠. 거기에 나처럼 직장을 다니면서 일을 하고 보상을 받았던 사람이 갑자기 계속 놀기만 하고 소비만 하려고 하니 이것도 힘들다는 거죠. 하지만 저는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생각해왔고 계획을 하면서 그만뒀잖아요. 그러니 남들 보다는 좀 더 여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퇴직 후 3년 정도는 너무나도 즐거웠어요. 그 기간동안 나만의 루틴(routine)도 생겼었죠.
하지만 그 기분이 올해 여름부터 싹 없어졌어요. 갱년기와 더위, 그리고 여러 가지 복합적인 사정 떄문이었죠. 무기력함에 매일매일 아무것도 하기가 싫은 거예요. 나는 너무 한가해서 뭐라도 할 수 있을텐데 무기력함은 아무 것도 하기 싫어하게 만들어요.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더 깊은 무기력이 찾아 오는 거예요. 예전에는 지인이 ‘무기력하다’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속으로 ‘아무것도 안 하는데 무기력하다는 게 무슨 말이야?’ 싶었는데, 제가 그런 상황인 거예요.
캐나다에서의 휴가
올 초에 해외로 휴가를 다녀왔어요. 남편이 준 '인생 휴가'인데, 캐나다 벤쿠버를 혼자서 다녀왔어요. 정말 혼자 타지에서 보내는 거였죠. 벤쿠버는 꽤 추웠어요. 추위를 막고자 내복을 위아래로 입어도 여전히 너무 춥다고 느낄 정도였어요. 벤쿠버에서는 '뼈가 시리는 추위를 느낄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었는데, 막상 현지에서 겪어보니 알겠더라고요. 봄이 오고, 꽃이 피어나는데도 계속 춥다고 느낄 정도였어요. 머물러 있는 동안은 매일 바깥을 걸어 다니려고 했어요. 주변 경관을 보려고요. 집에서 쉬었던 날이 하루 이틀일 정도로 거의 매일 걸어 다녔어요. 차 없이 걸어 다니라는 지인의 조언에 따라 엄청 걸어 다녔어요. 휴가를 다녀오면 제가 좀 달라질 줄 알았어요.
다 큰 어른이지만 다른 사람의 집에서 스테이(stay, 하숙)를 했어요. 그러다 한 번은 혼자 살아보고 싶어 발품을 팔아 집을 구하러 다녔어요. 쉽지는 않았지만 그 과정은 재미있었죠. 살 집을 계약했을 때는 '내가 여기서 집을 다 구해보네' 라는 생각에 제 자신이 너무 뿌듯했어요. 이곳에서의 시간이 저에게는 새로운 모험이었어요. 나이가 들어서도 이곳에 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대단하다고도 느꼈죠.
하지만 그 집에 들어가자마자 마음고생이 시작되었어요. 너무 서러웠죠. 원래 계획은 3개월이었지만, 마침 집에 불미스런 일이 생기는 바람에 예정보다 한 두 달 일찍 귀국하게 되었어요. 집에 돈 문제가 생긴 것도 있어요. 귀국 후 함께 생활했었던 룸메이트가 벚꽃이 핀 벤쿠버의 풍경을 사진을 찍어 저에게 보내주어요. 인도에서 온 아이였는데, 정말 똑똑한 아이였어요. 두 번째 집을 구해서 살고 있었고, 옆방에 사는 아이었어요. 캐나다에서 일을 하고 있다 하더군요. 20대 후반 정도로 젊었는데, 성격이 너무나 좋았어요. 한국 음식을 정말 좋아했어요. 김치도 잘 먹었어요. 그래서 집으로 돌아갈 때는 가지고 있는 한국 음식들을 다 줬어요. 정말 좋은 인연이었죠. 귀국할 즈음에는 한국에서 아주 어린 아이가 하나 왔어요. 대학교 1학년 또는 2학년인 아이였는데, 마지막까지 저에게 마음을 열지 않아 조금 아쉬웠어요.
집주인은 한인 이민자였어요. 하지만 살다 보니 첫인상과 다르게 못된 사람이었어서 마음 고생을 많이 했어요. 추운 겨울에 난방비를 아껴야 한다며 난방도 못 틀게 하는 등 여러 가지로 힘들게 했어요. 인도 아이도 저와 마찬가지로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8월이 되어 계약이 만료되면 바로 나갈 거라고 했어요. 집주인이 너무 나쁘다고 말을 듣는데 같은 한국인으로서는 창피했어요.
또 다른 한인 관련 에피소드도 있어요. 공항 픽업 서비스를 해 주시는 분이셨어요. 공항에서 만나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시는 건데, 처음에는 우버를 이용하려고 했지만, 먼저 다녀왔던 지인이 처음은 불안하니 한국 택시를 타라고 추천해서 따라 한거죠. 근데 막상 겪고 나니 우버를 이용했었어도 됐었을 법 했어요. 굳이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굳이 과한 비용을 내면서 까지 서비스를 받았어야 했나 싶은 거예요. 거기에 더해 기사님께서 저에게 계속 캐나다 생활에 대한 질문이나 조언을 주셨는데 그게 좀 불편했어요. 예를 들면 제가 살고자 하는 집의 주인을 믿을 만한지를 계속 물어보는 거죠.
나중에는 그분이 제가 한 말이 떠올랐다고 하면서 커피를 사주겠다고 따로 연락을 주는데 그마저도 너무 불편했어요. 처음 본 사이인데 만나자고 하니까요. 같이 살기로 했던 친구의 말로는 그 기사분께서 다른 사람에게 비슷한 방식으로 접근했던 안 좋은 사례가 있다고 말해주기도 했어요. 그렇다고 커피를 마시자는 그분의 말씀을 거절할 수가 없는 거예요. 결국 얘기를 나눠보니 계약이 끝나면 자기 집으로 이사 오라는 내용이었어요. 들었던 것과는 달리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 보이니 혼란스러웠어요. 그 친구가 나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해 준 건지 아니면 그 기사님께서 본심을 숨기고서 나에게 접근한 건지 잘 모르겠는거죠. 다행히 그 이후로는 특별히 뭘 하자는 말씀은 없었어요. 이런 경험을 해보니 외국에 나가면 더더욱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분별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가기 전에는 몰랐지만, 막상 살아보니 집주인이 나빴던 것 처럼요. 이 사람을 믿을 수 있는지 아닌지를 판단하기가 어려웠어요.
제가 휴가를 갈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의 지원 덕이었어요. 남편 말로는 제가 결혼한 후에 자주 “나는 가난하다”라는 말을 자기에게 했다고 해요. 우리 남편은 저에게 20대 시절에 방랑벽이 많아서 자기가 번 돈으로 외국에 가기도 하고, 또 한번은 유학 가 있는 동생을 꼬셔서 학교 대신 함께 해외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는 얘기를 자주 했어요. 그 말 때문인건지 제가 “당신은 부자여서 해외도 많이 다녔는데, 나는 먹고 사느라고 해외도 못 가봤다”며, “우리 때는 회사 다니다가 스물아홉이나 서른 즈음에 갑자기 유학을 간다며 회사를 그만두고 가는 애들이 천지에 깔렸는데, 나는 그 사이에서도 죽도록 일만 했다”라는 얘기를 계속 했다는 거죠. 한두 번은 말한 걸로 기억하는데, 남편은 제가 그 얘기를 계속 했다는 거예요. 어떤 때는 "누구는 팔자가 폈고..." 하는 얘기를 하기도 해서, 남편이 ‘내가 너를 언젠가 한번쯤은 유학을 보내주마’라는 생각을 했다고 해요.
남편을 만난 이후에는 해외를 가 볼 기회를 몇 번 놓쳤었어요. 남편과 교제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가 휴직 기간이었는데, 그때 제가 해외 선교사님한테 한두 달 정도 가 있고 싶다고 얘기를 해두었어요. 일 년간의 휴직 기간을 받게 되어서 해외 선교사님이 계신 곳을 가보고 싶다고 했죠. 그 시기는 저와 남편이 열렬하게 연애를 하던 때였어요. 그때는 서로가 존댓말을 사용할 때였는데, 남편이 "혹시 안 가면 안 되나요"라고 물어 보는게 기분 나쁘지 않더라고요. 저는 해외 선교에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는 데도, 이 사람이 나를 붙잡아주니 그 마음에 가지 않기로 했어요. 시간이 지나니 조금의 아쉬움은 있어요.
또는 퇴직을 앞두고 남편에게 “나는 퇴직을 하면 꼭 배낭여행을 한 달 간 다녀 올 거야”라는 얘기를 계속 했었어요. 근데 마침 회가를 그만둔 때가 코로나 시기였어요. 그러다 보니 해외는커녕 집 밖으로도 나가기가 어려웠고. 결국 이루지를 못했죠.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휴직 때도 못 가고, 퇴직 후에도 못 가고 계속 못 가게 되고.... 우리 남편은 옛날에는 그렇게 돌아다녔다는데도 결혼하고 나서는 자기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간다며, 책임감 있는 사람처럼 일하는 거예요. 그러다보니 멀리 여행을 못 가는 거죠. 동남아시아까지는 가봤지만, 저는 그보다 좀 더 멀리 가서 한 10일 정도만 같이 돌아다니고 싶었거든요. 그걸 이루지 못하니 한편으로는 너무 가고 싶은 마음이 점차 커지는 거예요. 하도 못 가게 되니까 어느 날은 남편에게 "그럼 난 억울하니까 제주도라도 가야겠어"라고 말하며 제주도에 가서 한 달 살기를 하고 왔어요. 퇴직 후에는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 하고 온 게 다였어요. 외국에 가보고 싶다는 열망을 늘 가지고 있다 보니 “이러다 진짜 평생 못 가겠어” 라는 말을 남편에게 했죠.
어느날은 남편이 저에게 옷을 버렸으면 한다며, 그래야 새로 살 수 있겠다는 거예요. 나는 버리는 걸 잘 못해요. 그러다보니 이것 저것 모아놓고 있어요. 버리기에는 소중한 물건들이기 때문이에요. 언젠가 우리 둘이서 유럽 여행을 하고 싶다는 말을 나한테 너무 많이 해서 저에게는 희망 고문과도 같아요. 언제는 유럽 여행을 가게 되면 꼭 쓰고 싶어 산 모자랑 옷이 몇 가지 있었어요. 저렴한 걸로 샀겠죠. 근데 옷인지 모자인지 시간이 지나 정리하다 보니 고무줄이 늘어진 걸 발견한 거예요. 삭았다는 거죠. 옷장에서 빼내고 있는데 고무줄 있는 부분이 끊어지는 느낌이 났어요. 그걸 보니 갑자기 너무 화가 나더라고요. 여태까지는 여행을 가지 않은거에 대해 크게 묻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혼자라도 한 번 긴 여행으로 가보겠다고 했어요.
새로운 여행은 설레면서도 두렵기도 해요. 갑자기 이 나이에 혼자 외국을 간다고 하면 주변에서 진짜 대단하다고 해요. 제가 원하는 휴가는 여행을 간다는 의미 보다는 거기 현지인처럼 살아보는 거였어요. 돌이켜보니 현지에서 살아보는 것은 제주도가 전부였어요. 제주도야 국내이니 내 마음대로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잖아요. 하나도 겁이 안 났죠. 근데 이제 캐나다는 완전히 집부터 시작해서 다 해내야 하는데 완전 생소한 거죠.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기분에 모험을 떠난다는 표현을 떠올리게 했어요. 이제 아이들한테도 내가 나이 들어 생소한 곳으로 떠나는 것도, 혼자서 한다는 힘든 길을 선택하는 것도 새로운 모험이라고 했죠. 그렇게 제 스스로 다짐을 하고 갔고, 가서는 너무 좋은 시간을 보냈지만, 돌아와서는 이렇게 내 생활이 흐지부지되고 무기력해질지 몰랐어요.
‘캐나다에서 혼자 살기’라는 새로운 도전도 해봤기에 뭔가 새로운 것들이 일어날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어요. 더위가 찾아 오면서 동시다발로 모든게 하기가 싫어지고 생활이 무기력해졌죠. 떠나기 전에 정리하고 싶은 인간관계가 있었어요. 아파트 커뮤니티를 동경했었는데, 막상 참여 해보니 너무 힘들더라고요. 나랑은 체질이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럼에도 이 관계를 끊기가 어려웠던 게 같은 아파트를 살다 보니 마주칠 수 밖에 없는 거예요. 맞지 않는 불편함에 가끔씩 만나는 사이도 힘들었어요. 그래서 만약 캐나다에 가면 3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죠. 전화가 안 될 거니까요. 있는 동안은 카카오톡만 사용했어요 결국 인간관계 등 많은 고민 거리들이 정리가 되었지만 막상 한국으로 돌아와서 일상을 보내니 어느 순간 나 혼자 고립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아파트 커뮤니티는 물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요.. 그저 나만의 느낌일 수도 있지만요. 올해가 유난히 혼자서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고자 노력했지만 거기에 따른 새로운 생각들도 많이 생겨났어요.
열 네번째 장: 오늘을 만들어가기
여름과 갱년기
이번 여름에 갱년기와 여러 가지 부정적인 것들이 한꺼번에 왔어요. 너무 무기력할 정도였어요. 갱년기로 인해 감정이나 불면 같은 것들을 다스리기 어려웠던 게 힘들더라고요. 하지만 다행이도 저는 생각보다 감정적인 사람은 아니에요. 온몸이 갑자기 뜨거워지는 열감이라든지, 불면증도 아주 심하게 오는 편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몇 가지가 계속 쌓이고 겹치다 보니 ‘이게 바로 갱년기구나’ 하고 알아차리게 된 거죠. 왜냐하면 이 불편함을 거스를 수가 없으니까요. 겪기 전까지는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에요. 어떤 때는 매우 화가나다가도 몇분만 지나면 이렇게까지 화날 일인가 싶을 정도로 감정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일이 생기는데, 그게 생각처럼 참아지지가 않아요. 예전에는 화가 나도 참고, 속상해도 참는 게 익숙했는데, 요즘은 그게 잘 안 되어요. 참기가 어려워져요. 예전에는 그래도 잘 이겨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예 누를 수가 없어요. 결국 남편한테 많이 풀어댔어요. 가끔은 내가 미쳤나 하는 생각도 해요. 언니에게 이런 내 변화된 모습을 설명 했더니, 괜찮아진 것 같아도 다시 찾아올 거라고 하더라고요. 갱년기는 주기적으로 온대요. 잠잠해져서 끝났나 싶으면 다시 오는 거죠. 오래 가는 사람은 십 년도 간다고 해요. 왜 그렇게 길게 지속되는지 모르겠어요.
만약 그랬더라면
제가 만약 취업을 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를 질문주셨는데, 상상해본다면 예술 분야의 공부를 다시 해서 그쪽으로 가지 않았을까 싶어요. 적성 검사를 받아보면 항상 그런 분야가 저한테 맞는다고 나와요. 그래서 예술 쪽에 더욱 관심이 생겼었어요. 이제는 제가 직접 하는 것은 못하지만, 이 분야에 있는 사람들과라도 가까워지고 싶어요. 예술을 향한 관심과 마음은 계속 있었어요. 연극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어요. 연기를 즐겨봤거든요. 연기든, 아니면 사진이든, 찍히는 것에 대한 것들은 뭐든지 좋아해요. 지금 세대였다면 한번 시도해봤을 것 같아요. 제 시대에는 생각의 틀 같은 게 있어서 행동으로 옮긴다는 게 생각보다 어려웠어요. 세대가 조금만 달랐다면 여러 가지를 다 해볼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방에 살고 있다는 지역적인 한계도 있었어요. 서울과는 멀다보니 그런 기회는 닿을 수 없다고 생각했죠. 지금은 지방 어느 곳에서도 서울에 당일로 다녀올 수 있게 되었어요. 지방에 거주하는 아이돌 지망생들이 매일 서울을 오가며 연습하는 영상도 본 적이 있어요. 그때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에요. 그 시절에는 학원도, 기획도 모두 서울에만 있는 것 같았죠. 지금은 어느 곳에서나 서울에 있는 뮤지컬이나 연극을 보고 싶으면 바로 올라갈 수 있어요. 사실 돌이켜보면 왜 그때의 저는 생각의 벽을 조금이라도 넘어볼 생각을 가지지 않았을까 싶어요.
자기 돌봄
요즘 트렌드가 ‘자기 돌봄’이라고 하더라고요. 모든 세대의 트렌드인지, 저 같은 중년 이후 세대의 트렌드인지는 모르겠어요. 저는 사람들에게 왜 돌봄에 관심이 생기는지 물어본 적이 있어요. 대부분은 스스로를 돌보지 못한 자기 자신이 불쌍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제 감정이나 상태를 계속 관찰해 온 편이라서 그 말이 크게 와닿지 않았어요. 저는 제 상태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냥 남은 시간 동안 더 즐거운 일을 해보자는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저도 제 자신이 불쌍하다고 느꼈어요. 돌봄을 받고 싶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어요. 봉사, 선교, 인생 일지, 가정 상담, 종교 활동 등 사회적 참여를 하면서 이제는 내가 다른 사람을 보살피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한편으로는 진짜 보살핌을 받아본 적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모든, 형제든, 남편이든, 누군가에게 사랑을 듬뿍 받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그게 이제는 천국에 가서 받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을 때, 제 자신이 불쌍하게 느껴졌어요.
그런데 이런 생각은 제가 너무 한가해지면서 무기력이 찾아올 때 생기더라고요. 무언가를 하고 있을 때는 그런 생각이 별로 안 들어요. 최근에 가정불화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분이 ‘자기 자신이 불쌍하다’고 말한 걸 들었어요. 제가 봐도 정말 불쌍하더라고요.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는데도 잘 안 되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사람을 보면 안타깝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저는 그냥 ‘그럴 수 있다’고 말해줘요. 가끔은 자기 자신이 불쌍해야 스스로를 돌본다고도 하면서요.
저는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돌보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젊은 사람들은 잘 하는데, 30대, 40대, 50대가 제일 소홀하다고 느껴요. 저도 그 나이대에는 일을 정말 많이 했고, 저를 소홀히 했어요. 지금은 ‘내가 건강해야 남을 돌본다’고 생각해요. 내가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건강해야 다른 사람도 돌볼 수 있어요. 회사 다니던 시절에는 정말 ‘만신창이처럼 일한다’는 표현이 어울렸어요. 몸을 돌보지 않고 일만 했어요. 남편은 언제 그렇게 힘들었냐고 하겠지만, 저는 일이 끝나면 아무 기운이 없었어요. 돌이켜보면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었어요. 스스로를 챙기는 건 진짜 중요해요. 내 몸과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알아차리는 연습이 필요해요. 예전에는 몸이 아파도 참았어요. 저는 참는 걸 잘하거든요. 배가 꼬여서 죽을 것 같아도 참았어요. 그런 이야기가 참 많은데, 나중에 보니까 그게 바보 같은 짓이었어요. 최근에 아프고 투병하면서 ‘내가 너무 바보 같은 짓을 했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회사 다니면서 자기를 돌보는 건 쉽지 않아요. 일단 일을 먼저 끝내고 쉬자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요. 그런데 다른 사람 눈에는 이미 쉬어야 하는 사람으로 보였을 거예요. 몸을 많이 혹사시키고 있었던 거죠.
앞으로의 계획
지난 3년 동안은 나만의 시간을 여유롭게 보내봤어요. 봉사를 하든, 취미 생활을 하든, 자유롭게 보냈어요. 다시 조직 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없지만,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고는 싶어요. ‘이건 재밌네’라고 느낄 수 있는 것들, 직업이든 취미든, 그런 것들을 찾아보고 싶어요. 남은 인생에서는 내가 즐거워하는 일을 한 번은 해보고 싶어요.